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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차이나타운의 끝나지 않은 향수병

작성일2011.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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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기자단

이민 역사 200, 여전히 고향을 꿈꾸다.

싱가포르 차이나타운 우차수(牛車水)’에서 느끼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타향살이의 외로움을 극복해가는 이야기들.

 

- 강이 푸르니 새가 더욱 희고
- 산이 푸르니 꽃 더욱 붉게 타네
- 이 봄도 또 속절없이 지나 가는데
- 고향에 돌아갈 날 그 언제인가

 

당나라의 시인 두보의 오언절구 江璧이다. 속절없이 지나가는 봄날 속에서 타향살이의 처량한 심정을 강과 새, 산과 꽃이라는 색의 극명한 대비로 절절하게 표현하였다.

사실 두보는 그나마 같은 대륙 내에서 자신의 고향을 찾아가지 못한 것이었지만, 많은 화교들은 이 짧은 두보의 시에 눈물을 흘릴 정도로 타향살이의 역사가 깊다. 이런 타향살이의 아픔을 지닌 중국인들은 서로를 달래고 힘을 합하기 위해 함께 모여 살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현재 전 세계에 퍼져있는 차이나타운의 유래이다.

대부분의 동남아시아 국가에는 화교가 자리잡고 있다. 본적이 중국인 이 화교들은 이민자로써 늘 핍박 받고 홀대 받아왔다. 특히 상업에 뛰어난 중국인들이 경제적으로 현지인들보다 훨씬 윤택하자 많은 차별을 받았다. 이민자에 대한 차별 의식은 현재까지도 동남아시아 곳곳에 그 잔재가 남아있을 정도로 뿌리깊다.

하지만 이러한 중국인들이 이제 더 이상 이민자가 아니라 현지인이 된 곳이 있다. 바로 싱가포르다. 싱가포르는 화교(싱가포르 국적의 순수 화교(華僑)를 의미한다)의 비율이 75%가 넘을 정도로 중국 출신인의 비율이 많다. 공용어가 중국어일 정도로 싱가포르에서 중국인이 경제적, 문화적으로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중국인들은 더 이상 현지인들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싱가포르의 중국인들은 마음 속에 고향에 대한 열망이 가득하다. 어디 사람이냐고 물으면 심지어 할아버지, 할머니의 본적인 광동”, “하이난같은 중국의 도시들을 말한다. 이미 3~4 세대가 넘게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다시 대륙으로 돌아가야 한다.’ 라는 마음이 뿌리 깊다. 타향살이의 고달픔은 고향에 대한 마음을 더욱 간절하게 만드는 것일까

이렇게 타향살이의 아픔과 새 땅에 대한 희망, 그리고 귀향에 대한 갈망이 함께 공존하는 곳. 이곳 싱가포르 차이나타운 우차수에서 격동적이었던 역사의 향기를 느끼며 그 매력에 흠뻑 젖어보자.

 


싱가포르 파고다 스트리트의 차이나 타운 우차수 표지판

 

부유한 국제 무역항의 기원지. 싱가포르 우차수의 중국 상인들

싱가포르는 동남아시아 가운데에 위치한 경제적으로 가장 부유한 국가 중 하나이다. 아시아 국가 중 1인당 GDP가 가장 높은 국가이며 동시에 화려한 쇼핑 센터와 관광지로 유명하다. 또 규모가 크지 않아서 주말 여행지로도 적합한 곳이다. 2010년 싱가포르를 찾은 관광객만 무려 1160만명에 이른다.

이런 싱가포르에 가장 대표적인 관광지중 하나가 바로 차이나타운이다. 많은 중국인 비율 덕분에 싱가포르는 1800년대 초부터 중국인의 역사가 이어져 내려왔으며, 그 전통이 현재까지 고스란히 남아있다.

하지만 여타 국가의 차이나타운과 다르게 이 곳 싱가포르 차이나 타운 우차수는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영국과 말레이시아, 인도 그리고 중국의 문화가 한데 섞여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차이나타운의 모습을 상상한다면 아마도 깜짝 놀랄 것이다.

싱가포르 이민의 역사는 명나라 시기로 거슬러 간다. 정화의 대원정을 계기로 말레이반도가 중국인들에게 알려지면서 조금씩 이주해 왔다. 하지만 당시에는 크지 않은 무역 도시였다. 싱가포르는 1819년 영국 동인도 회사의 토마스 스탬포드 레플스경이 싱가포르를 관할하면서 국제 무역항으로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1819
년 당시 싱가포르의 모습

 

말레이반도의 지리적 이점으로 중요한 국제 무역항으로 이름이 알려지고 중국의 수많은 무역상들이 이주해 오면서 차이나타운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828년 레플스 경은 싱가포르가 중국인 다수의 사회가 될 것을 예측하고 싱가포르 강의 남서쪽의 땅을 중국인 지역으로 계획하였다. 이 것이 바로 차이나 타운 우차수의 시초이다.

우차수(牛車水)라는 차이나타운 지역 명은 매우 독특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싱가포르 차이나타운은 19세기에 우물을 파지 않고 강에서 수레로 물을 직접 공급받았다. 우차수는 이러한 지역의 역사를 반영하는 명칭이다.

 


수레로 물을 나르는 모습. 이러한 모습이 지명이 되었다.

 

희망과 약속의 땅을 향해! 중국인들의 대규모 이민 붐!

19세기 초, 중반에 부유 상인들이 주로 이주해 왔다면,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는 전란과 재해를 피해 중국 광동과 홍콩 부근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왔다. 이주민은 19세기 후반, 중국과 싱가포르를 연결하는 증기선이 생긴 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전 중국 대륙의 더욱 많은 중국인들이 타향길에 올랐다. 그들은 대다수가 가난에 시달려온 농민들이었다.

   사람들은 바다를 건너 싱가포르에 도착하기 위해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표 값은 금화 1온스에 해당하는 홍콩 달러 $20. 현재가치로 약 백이십만원의 높은 가격이다. 이러한 가격에도 불구하고 매번 수 천명의 사람들이 배에 올랐다.


증기선 취항을 위해 준비하는 사람들의 모습

    하지만 배 안에서도 전염병이 돌았기 때문에 배를 타고 오는 사람들 중 절반이 죽거나 병들어 싱가포르에 도착하지 못했다. 배 안에서 죽거나 병든 사람들은 바다에 버려졌다. 이런 암울하고 고단한 상황을 견디다 싱가포르 마리나 베이의 존스톤 피어(현재 이곳엔 플러톤 베이 호텔이 자리잡고 있다)에 밝게 밝혀져 있는 붉은 홍등을 보게 되면 배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감격에 젖어 울음을 터트렸다. 이 감격스런 붉은 빛을 기념하여 현재 이곳에 자리잡은 플러톤 베이 호텔 식당에서는 한 해에 두 번 붉은 홍등을 걸어둔다.


현재 Fullerton Bay Hotel은 당시의 상황을 기념하여 이곳에 홍등을 건다.

  싱가포르에 도착한 사람들은 대부분 농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취업을 위한 국제 무역항에서 생계를 이을만한 특별한 기술이 없었다. 따라서 대부분 막노동을 해서 생계를 이어나갔다. 이 자세한 내막을 알아보기 위해 흔적을 찾아 호텔 주변을 전전긍긍하던 도중 운 좋게도 플러톤 베이 호텔에 매니저로 근무하는 필립(60)씨를 만나 당시 상황의 이모저모를 들을 수 있었다. 

 필립씨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광동성에서 싱가포르로 이민을 왔다고 한다. 중국인들이 도착하여 닻을 내리던 곳은 현재 보트 키(Boat Quay)라 불리우는 지역이며 유흥가에서 나오는 붉은 홍등을 희망의 불빛으로 여겼다고 한다. 도착한 곳에서 집단으로 중국인 촌을 만들어 생활했지만 특별한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상단의 짊을 싣고, 쌀과 고무, 목재를 나르는 등의 일을 했다. 하지만 급격하게 늘어난 중국인으로 인해서 노동시장이 제한을 받게 되고, 현지 내에서도 일자리가 부족해지자 중국인과 현지인의 관계가 악화되었다고 설명 했다.


중국인들이 도착해서 닻을 내리던 보트 키(Boat Quay)의 현재 모습

필립씨에게 다시 중국으로 건너갈 생각이 있냐고 물었더니 바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자신의 본적은 중국 광동성이며 죽기 전에 중국으로 건너가서 살 생각이라면서 기회가 된다면 자신의 할아버지와 부모님의 유골도 함께 가져가고 싶단 말도 덧붙였다. 중국어로 말하는 그의 눈에 비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참으로 애절해 보였다.

 

침만 뱉어도 도덕적으로 엄격한 나라에서 도박과 성매매가 합법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침 뱉고 담배꽁초만 버려도 엄청난 벌금형을 받는 싱가포르에서 도박과 성매매가 합법이라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서 기자 스스로도 늘 의아해 했으며, 싱가포르라는 나라의 이중성에 대해서 부정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차이나 타운의 역사를 이해하게 되면서 이러한 모순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20세기 초, 수 많은 이주민들은 대부분 남성이었다.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싱가포르에 도착한 남성들은 대부분 값싼 노동력을 제공했다. 처음에는 기존에 살던 화교들의 도움으로 따로 가정도 차리고 사회에 적응하는 듯 했다. 하지만 남성 이주민의 인구가 더욱 많아지고 성비의 불균형이 심각해지자 비율이 많은 남성들은 적은 여성들과 종종 문란한 혼전 관계를 맺었다. 또 노동의 스트레스로 강간과 불륜, 각종 범죄가 난무했다. 따라서 1870년 노동인구의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된 이래로 싱가포르 차이나타운은 성병과 각종 전염병이 난무하게 되었다.

 
중국에서 건너온 많은 남성 이주민들이 값싼 노동력을 제공했다

이에 싱가포르의 통치자들은 이러한 사회 문제를 타계하기 위해 여성 이주민들을 불러들이려 했으나 시대적 여건상 여성들이 쉽게 이주할 수 없었다. 결국 남성 노동자들의 타향살이를 달래기 위해 공창(公娼)제도와 도박(賭博)을 합법화 시키기에 이르렀다. 이 법의 발현으로 중국, 일본, 유럽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매춘부들이 싱가포르로 넘어오게 되었다. 이 매춘부들은 현재까지도 Geylang 지역에 모여 집장촌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제도로 인해서 다시 한번 노동자의 수도 급증하게 되어 차이나 타운의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났으며, 기존의 우차수 지역에서 벗어나 싱가포르 남부 및 동부 전역까지 그 세력을 확장하게 되었다.


19
세기 말 싱가포르 차이나 타운 매춘부 방의 모습

 타향살이로 인한 중국인들의 향수병. 그리고 그로 인해 야기된 사회 문제. 이 점은 화교 사회의 보수적인 생각으로는 쉽게 해결할 수 없었던 부분이다. 따라서 공창제도와 도박 합법화가 정립 되기까지 많은 충돌이 있었다. 실제로 1887년에 이 법이 금지가 되었지만, 사회적인 문제가 또 발생하자 1894년에 다시 합법화 되었다.

이러한 험난한 역사와 과정에도 불구하고, 싱가포르를 관광하는 많은 한국인들이 오해하는 사실 하나는 싱가포르의 도박과 성매매는 자본주의 화교 국가의 특성상 본래 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한국인들이 도박과 성매매를 관광상품으로 활용한다. 하지만 싱가포르 또한 이 문제 때문에 현재까지도 많은 사회 문제를 낳고 있다. 또 한국에서는 엄연한 불법이므로 입국시 처벌을 받게 된다. 역사는 알되 오용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차이나 타운은 먹자 골목 관광 코스! 하지만 일제의 역사와 함께......

싱가포르의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염차나 각종 중국음식들을 먹으러 차이나 타운에 간다. 차이나 타운이 음식으로 매우 유명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중국의 각종 지방의 요리들을 모두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광동과 대만 음식인 염차 메뉴에서도 중국 북방의 요리가 나오기도 한다. 수 많은 관광객들에게 차이나타운은 먹자 골목으로 매우 유명할 수 밖에 없다.


아침 10, 차이나타운의 음식점들이 점심 시간을 준비하고 있다.

이러한 요식업의 발달 원인에 대해 대부분 다문화적인 요인을 꼽는다.  관광객들은 차이나 타운의 이국적인 모습에서 매력을 느낀다. 영국풍 바로크 양식과 중국식 건축 양식이 더해져서 묘한 매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또 차이나 타운 앞에는 힌두 사원과 불교 사원, 교회가 동시에 있을 정도로 다양한 종교를 지닌 인종들이 오고 간다. 이러한 다문화 적인 특징이 차이나 타운을 먹자 골목으로 더욱 흥하게 만들 수 있었던 기반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들은 어째서 국제 무역으로 유명하던 차이나 타운이 현재 대부분 유흥가나 먹자 골목이 되어야만 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 해답은 바로 1940년대 일제 강점기에 있다.


1940
년대 식당을 재현한 모습, 이 당시 대부분의 화교들이 요식업을 택했다.

1940년 일제가 싱가포르를 지배한 후 싱가포르의 국가 경제는 마비되어 버렸다. 많은 남성들이 전쟁에 차출되고 동남아시아 전초기지로 활용되면서 국가 경제는 일본에 부속되었다. 또 일제는 동맹국들과의 교역 외에는 허가하지 않았기 무역업에 종사하던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일을 포기하고 대부분 요식업과 숙박업, 의류 산업에 뛰어들게 되었다.

이미 차이나 타운에는 중국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 점이 강점으로 작용하여 차이나 타운에서는 중국 모든 지방의 요리들을 먹을 수 있었다. 다양성을 확보함으로써 새로운 요리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전 세계에서 요식업에 관련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 덕분에 차이나타운의 요식업은 독립 후에 바로 큰 호황을 이루게 되었다.

 
싱가포르 차이나 타운 박물관에는 당시의 다양한 요리들을 재연해 놓았다

역설적이게도 현재의 싱가포르 사람들은 과거 일제의 통치를 크게 싫어하지 않는 분위기이다. 일제가 없었다면 현재의 관광 산업이 쉽게 발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종종 들린다. 일제의 침탈로 국가 경제가 파탄 난 우리나라와는 대조적인 상황이다. 이러한 일제의 통치를 이겨내고 새로운 문화로 만들어낸 싱가포르 차이나타운의 모습을 보며 역사는 늘 발전하는 방향으로 흐른다는 법칙이 머리 속에서 맴돌았다.

 

200년이 넘었건만, 여전히 나는 가고 싶다. 나의 고향에!

시간이 흘러 이제 많은 세대가 지나 싱가포르의 주요 민족은 중국인이 되었다. 스페인, 영국,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아 문화나 풍습이 제법 많이 변했을 수도 있지만 차이나 타운은 아직도 중국 그대로의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신년에는 폭죽을 터트리는 풍습부터, 차를 마시고 중국 음식을 매일 먹는 식습관, 그리고 중국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등 여전히 본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동남아시아의 화교들은 모두 공통점이 있다. 대부분 같은 종교를 믿고, 보수적이며, 절대 다른 민족들과 결혼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중화 사상이 뿌리깊게 박혀있기 때문이다.

수 백년간 이어온 이민자의 아픔 속에서 새로 피어난 그들만의 독특한 정체성이 있다. 길을 가다 싱가포르 인에게 묻는다.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그러면 절반 이상의 사람들이 이렇게 대답한다. “저는 화교(중국인) 입니다!” 그들에게는 비록 싱가포르에서 태어났어도 싱가포르 인이 아니다. 그들의 유전자 속에는 타향살이의 외로움이 영원히 가시지 않을 듯 하다.

 


싱가포르의 마리나 베이 야경 속으로 중국인들의 욕망과 희망, 그리움이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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