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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F 터키]MUST HAVE ITEM 아야소피아

작성일2013.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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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기자단

 

  삼국시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는 서로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수 많은 다툼을 벌였다. 고구려는 한강을 '아리수'라 불렀고, 백제는 '욱리하'라고 불렀다. 역사적으로 어느 나라에서나 원하는 요충지에는 그 곳만의 특별한 것이 있다. 세계적으로 강이 있는 곳은 문명이 시작되는 곳과 일치한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은 한강을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에 집중 했던 것이고, 조선의 수도 속 중심지 역할까지 했던 것이 한강 이었던 것이다. 한강의 이름은 정복하는 나라에 따라 계속 바뀌었고, 그 강은 위대한 왕들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 그 이상의 것이었다. 이스탄불에도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 존재 했으니, 그것은 지금의 ‘아야소피아 박물관’ 이다.  

 

  


 

 

  터키 이스탄불은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가 되어 왔고, 전략적 요충지로써의 구실을 톡톡히 해왔다. 동서양의 중심지로써 두 곳의 문화를 절묘하게 섞어 놓은 유일무이한 매력을 풍긴다. 이런 이스탄불의 대표적 건축물인 ‘아야소피아 박물관’. 이 곳은 성당과 이슬람 사원이 모두 존재한다.  

 

 

 

  이것이 무슨말인지 의아할 것이다.  ‘아야소피아 박물관’의 본래 이름은 ‘하기아 소피아’ 로 비잔틴 제국의 성당이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나무 지붕의 성당으로 처음 지어졌으나 지진 피해와 종교 문제로 소실되었다. 그 뒤, 재건 되나 종교적 쿠데타로 인해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쿠데타를 진압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온 나라의 인력을 끌어 들이고 독려하며 5년 만에 ‘하기아 소피아’를 완공 해냈다. 그리고 그는 하늘을 향해 두팔을 벌리고 외쳤다. “솔로몬, 내가 당신을 이겼노라!” 

 

 

 

 

 
  ‘하기아 소피아’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써, 537년 지어진 이후로 그 어느 건축물도 ‘하기아 소피아’를 능가하지 못했다. 이런 성당의 이름이 바뀌게 된 때는 1453년이다. 오스만 제국의 침략으로 인해 성당은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병사들은 성당의 물건들과 장식품들을 약탈했고, 부수기 바빴다. 하지만 그것을 본 술탄 메메드 2세는 ‘하기아 소피아’의 자태에 반해 약탈을 전면 중지시키고,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할 것을 명했다.  그렇게 두번째 이름 ‘아야소피아 사원’을 갖게 되었다. 

 

 

  술탄은 ‘아야소피아 사원’으로 바뀐 ‘하기아 소피아’의 기독교 성화들을 훼손 시키지 못하게 하면서 사원으로 이끌어 나갔다. 삼국시대에 이름을 바꿔가면서 애착을 갖고 지키려고 했던 한강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았다. ‘아야소피아 사원’과 ‘한강’은 그시절, 잇 아이템(It Item) 이 아니었을까

  

 


 

 

  1923년 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하기아 소피아’ 를 반환하라는 유럽의 요구에 1935년 2월 ‘아야소피아 박물관’으로 바꾸었다. 한 세월은 비잔틴 교회로, 또 한세월은 오스만 제국의 사원으로 쓰여 왔던 ‘하기아 소피아’의 우여곡절은 이로써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제는 아름다운 문화재만을 간직한 채 이스탄불의 가장 높은 언덕에 ‘공존’을 외치며 서있다. 동서양의 한 가운데, 화해와 공존의 의미로 우뚝 솟아 있는 ‘아야소피아 박물관’은 전 세계의 잇 아이템이라는 말이 가장 어울린다. 

 

 

 

 

 
  ‘아야소피아 박물관’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모자이크는 유명한 데이시스 (Deisis)이다. 아랫 부분은 소실되어 볼 수 없었지만, 그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을 방문 했을때 보았던 금박 장식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금박에서 신성함이 풍겨나오는 듯 했다.

  

 

  물론 ‘하기아 소피아’ 와 베르사유 궁전이 금박 장식을 사용한 목적이 달랐던 것도 한몫 하겠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이렇게 확연히 다른 느낌을 줄 줄은 몰랐다. 건축물 안으로 들어온 햇빛이 금박을 은은하게 비추며 모자이크를 빛나게 하는 순간, 터키에 오게 된 것에 감사했다. 돔 천장을 보게 되면 아기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의 황금 모자이크를 볼 수 있었다. 

 

 

 

  ‘아야소피아 박물관’에 들어와서 철없이 떠들고 장난치던 아이들 조차도 아기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의 황금 모자이크를 보는 순간 경건해지고 말았다. 한없이 바라보고만 있게 만드는 마력이 있는 것 같았다. 복음서를 들고 있는 그리스도와 콘스탄티누스 9세가 금화를 넣은 주머니를 양손으로 들고 황후와 함께 있는 모자이크도 있었다. 

 

 

  이 모자이크에서 황후의 남편이 세번 바뀌었기 때문에 황제의 얼굴 또한 세 번의 수정을 거쳤다고 하는 재미있는 일화가 존재한다. 그 옆의 모자이크 벽화에는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성모마리아와 요한네스 2세, 그리고 기증서를 들고 있는 황후 이레네가 그려져 있었다. 몇 백년간 빛을 머금어 온 것처럼 스스로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술탄 메메드 2세는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의 모습을 인정했지만, 그의 증손인 슐레이만 1세는 이교도 숭배라며 회반죽으로 대성당을 나타내는 모든 것을 덮으라 명했다. 그래서 지금의 이 건축물엔 회반죽을 사이에 두고 이슬람과 기독교가 공존하고 있다. 1932년 미국의 토마스 위트모어가 빛나는 모자이크화를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회반죽을 조금씩 긁어내는 작업에 나섰고, 지금은 웬만한 모자이크들은 제모습을 갖추고 있는 상태이다. 앞서 말했듯이 지금 ‘아야소피아 박물관’ 은 동서양의 공존이라고 칭할 수 있다. 아야 소피아를 짓는데 사용한 석재가 여러나라에서 운반해 온 것이라고 한다. 에페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가져온 기둥도 있고, 레바논에 있는 바르베크의 아폴론 신전에서 가져온 기둥도 있었다.  

 

 

  찬란했던 비잔틴 제국의 힘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돔 아래쪽으로는 아랍어로 쓴 동그란 판이 여러개 걸려 있었다. 이슬람 선지자들의 이름을 쓴 판으로 성모마리아 모자이크와 함께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었다. 

 

 

  알라와 무함마드의 이름이 적힌 판 사이에 마리아와 예수의 모자이크가 보이는 것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장관이었다. 기존의 대성당의 모습을 파괴하지 않고 그곳에 이슬람 문화를 넣은 것은 아름다운 공존 그 이상의 것이었다.

  


 

 

 

  ‘아야소피아 박물관’에 두 세시간은 거뜬히 있을 수 있겠다 생각 한건 우리가 그 곳에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알게 되었다. 데이시스 모자이크의 예수님의 눈에 바로 그 해답이 있었다. 박물관의 어느 곳에서나 예수님의 눈은 나를 향해 있었다. 박물관에 들어온 순간 예수님과 눈을 마주치는 시점부터 마치 홀린 사람처럼 그곳에 스며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를 또 놀라게 한 것은 북쪽 돔 네 귀퉁이에 있는 여섯개의 날개를 가진 천사 모자이크였다. 천사 중에서 제일 품계가 높은 천사이며, 두 날개로 자기 얼굴을 가리고, 두 날개로 발을 가리고, 나머지 두 날개로 날면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하느님의 뜻을 전한다고 한다. 귀퉁이의 천사들을 하나하나 찬찬히 살펴보던 중, 모두 얼굴이 가려져 있단 것을 알게 되었다. 마지막 천사를 바라보았을 때, 나와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게 된 천사의 눈이 나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내가 잘못 본것인가 나만 천사의 얼굴이 보이는 건가’  

 

 

  사실은 그게 아니고, ‘아야소피아 박물관’까지 온 여행자들을 위한 작은 배려라고 한다. 먼 ‘아야소피아 박물관’까지 와서 천사의 얼굴 한번은 보고가야지 않겠는가 

 

  1층에 세워진 ‘땀 흘리는 기둥’엔 소원을 빌면 이루어 진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있었다. 어느날 머리가 너무 복잡했던 술탄이 이 기둥에 머리를 잠시 댄 순간 두통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 이후 이 기둥은 사람들의 걱정 고민을 없애주는, 소원을 이뤄주는 기둥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이 소원을 잘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왜 소원을 비는 방법이 약간 독특하고 번거로워서 사람들이 정작 소원은 까먹어 버린다고, 하하! 

 

  1500년동안 이스탄불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아야소피아 박물관’ 한번은 비잔틴 제국의 대성당으로, 한번은 오스만 제국의 사원으로, 그리고 우리 모두의 ‘아야소피아 박물관’ 이 되기까지 많은 아픔과 시련을 견뎌냈을 것이다. 사실 직접 ‘아야소피아 박물관’을 가기 전까진 그 장관을 짐작하지 못했다. 처음 발을 들였을 때, 그 크기에 한 번 놀라고, 모자이크에 두 번 놀라고, 기독교와 이슬람의 공존에 세 번 놀랐다. 그리고 경건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내 마음속 건축물 넘버원은 ‘아야소피아 박물관’이 될 것이다. 밤마다 돔이 열리며 진짜 천사가 날아갈 것만 같은 것은 나의 상상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누구라도 이스탄불에 가게 된다면 짙은 밤 ‘아야소피아 박물관’ 돔을 유심히 봐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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