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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F 터키] 83개 상자에 담긴 사랑

작성일2013.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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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기자단

 
 
  2006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오르한 파묵의 책 ‘순수 박물관’은 자신의 인생 자체나 다름 없는 여인(퓌순)에 대한 한 남자(케말)의 사랑과 집착을 다룬 이야기이다. 배경은 1970년대 이스탄불, 부유한 집안의 청년 케말은 ‘자신과 잘 어울릴만한’ 신여성 시벨과 약혼한 상태. 그러나 결혼을 얼마 앞두고 우연히 연이 닿은 먼 친척 퓌순을 만나면서 모진 사랑의 길을 걷게 된다.     

  

  영원을 약속할 것만 같았던 남자로부터 받은 배신감 때문일까, 케말과 시벨의 약혼식을 본 퓌순은 상처를 받고 모습을 감춘다. 케말은 뒤늦게 자신이 진정 사랑하는 여인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퓌순을 찾아 나서지만 그녀의 옆에는 이미 다른 남자가 서 있었다. 케말과 퓌순이 사랑을 나누었던 44일간의 기억, 그 후 339일만의 재회. 모든 것은 변해있었다. 그는 자신이 뒤틀어버린 운명에 순응이라도 하는 듯 그로부터 2864일 동안 그녀를 바라보며 퓌순의 손길이 묻어난 물건들을 수집해나간다. 담배꽁초, 사이다 병, 머리핀 등 그녀와의 연결고리가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의 수집 대상이었다. 

 

  

 

  

 

 

  두 사람이 연인 관계로 다시 만나기 까지는 10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 쌓아왔던 감정과 내적 갈등이 폭발하며 불의의 차 사고가 발생하고 만다. 결국 그녀는 세상을 떠나고, 혼자 남은 그는 그녀가 살던 집을 ‘의미 있는’ 물건들로 채워가며 ‘순수 박물관’을 세우게 된다. 30년간 이어진 사랑과 집착이 ‘순수’란 이름의 박물관으로 남게 된 것이다. 

  

 

  이 소설의 주된 내용은 사랑이지만 그 안에는 당시 터키의 시대상, 성(性)적 가치관부터 서구 사회에 대한 동경, 정치적 이념대립, 상류사회의 허영심 등이 모두 담겨있다. 한국인인 나조차 이 소설을 읽고 어렴풋이나마 과거의 이스탄불을 그려볼 수 있었으니 작가인 오르한 파묵이 얼마나 꼼꼼하게 책을 써내려 갔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니 이곳 시민들에게는 얼마나 더 각별하게 다가올까. 나는 예전에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읽고는 종로에 가서 ‘이곳이 화신 백화점 터인가…’하며 일종의 스케치 작업 비슷한걸 했던 기억이 있다. 허구와 현실이 적당히 결합하며 이야기 속으로 더욱 빨려 들어가는 상당히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이러한 독자들의 욕구를 가장 잘 알고, 가장 완벽하게 표현해낸 것이 오르한 파묵의 ‘순수 박물관’이다. 소설 속에서 케말의 부탁을 받아 그들의 사랑 이야기를 소설로 쓰게 된 사람을 자기 자신(오르한 파묵)으로 설정하여 그저 ‘소설’에 그칠 수 있었던 것들을 교묘하게 책 밖으로 꺼내 놓았다. 케말이 실재했던 인물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파묵의 작업은 치밀하고 섬세했다.   

 

 

 

 

 

 

  책에 나와 있는 지도를 따라 추쿠르주마 대로-골목이란 단어가 더 어울린다-로 발걸음을 옮기니 붉은 집, 바로 ‘순수 박물관’이 보였다. 둘의 사연이 담긴 오브제들을 보며 케말의 사랑을 ‘현실적으로’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소설을 읽은 한 명의 독자로서, 또한 ‘사랑’이란 가치에 궁금증이 많은 청년으로서 한껏 기대를 품고 박물관 안으로 발을 들였다. (책의 2권 p.386을 보면 1회 무료 입장권이 있다) 입장권에 도장을 찍고 가장 먼저 보인 건 수많은 담배꽁초였다.  

 

  

 

 

 

 

 

  소름 끼치도록 집착이 심한 케말의 사랑법이 그대로 드러나는 장면이다. 그는 아주 예민하고 똑똑한 사람인 게 분명하다. 아니, 퓌순에 대해서 만큼은 전문가라고 하는 편이 좋겠다. 그녀가 담배를 피는 모습에서 그는 여러 가지를 추측 또는 확신한다. 어디까지 피웠는지, 신경질적으로 재떨이에 비벼 껐는지 모든 게 그의 관심 대상이다. 그저 모으는 것이 다가 아니라 순간의 분위기와 그녀에 대한 기억이 담긴 물건인 것이다. 이런 그의 광적인 사랑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해해보려 노력했다. 그러다 이내 ‘내가 이걸 왜 이해해야 하지’란 생각이 들어 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올라갔다. 

 

 


  내부는 차분하면서 따뜻했다. 동시에 철저하게 짜여진 공간이란 기분이 들어 숨을 크게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책은 총 83장으로 이루어졌는데, 박물관에는 83개의 상자에 각 장에 맞는 오브제들이 담겨 있었다. 파묵이 한때 건축학도였던(그는 이스탄불 공대에서 건축학을 공부하다 그만두었다.) 점도 작용한 걸까, 그가 만든 공간 안에서 내가 그의 의도대로 보고, 움직이고,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까지 받았다.  

 

  가장 눈 여겨 봤던 것은 73번 상자에 담긴 퓌순의 옷. 8년이나 돌고 돌아 다시 한번 케말에게 찾아온 기회, 그의 말대로 신이 그들에게 세 번째 기회는 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일까, 그는 극도의 긴장과 흥분에 둘러 쌓인다. 운전 면허 시험 대비를 핑계 삼아 시작된 그들의 만남 때마다 퓌순은 항상 같은 옷-흰 바탕에 오렌지색 장미와 초록색 이파리가 그려져 있는 원피스-을 입고 나온다. 운전에 서툰 퓌순과, 그 옆엔 이기적이고 사랑에 서툴렀던 케말이 앉아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때의 부끄러움, 긴장감, 당황스러움과, 그녀와의 작은 접촉에도 깊은 의미를 부여하던 케말의 감상(感想)이 그대로 녹아 든 이 원피스는 내가 머릿속에서 만들어 본 그것보다 한결 고왔다. 

 

  부지런히 움직이며 책을 펼치고 상자 안을 확인하는 과정을 몇 번이나 반복하였다. 나의 상상과 케말이 진열해놓은 ‘물체’들이 끊임 없이 상호 작용하며 결합하였다. 허구와 실제 사이의 벽이 조금씩 무너지고, 흐릿했던 그림들이 구체화되는, 모호해지면서도 뚜렷해지는 야릇한 과정이었다. 시간이 흐르자 이것이 소설 속의 이야기인지 아닌지 하는 건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단지 케말과 퓌순의 사랑을 온전히 바라보기 위해 노력했으며, 퓌순이 지냈던 지붕 아래 방이 가까워 질수록 왠지 케말의 마음을, 그 광기 어린 사랑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분명 사랑을 대하는 케말의 방법은 지독했고 소름 끼치기까지 했다. 그러나 시각을 조금 달리해보면, 누구나 사연이 담긴 물건 하나 씩은 있으며, 그것들을 자기 위안이나 과거 회상의 도구로 삼는 것은 인류 보편적 방식이다. 수필 ‘인연’에서 피천득 작가가 여자들의 우산을 볼 때면 첫사랑 아사코의 고운 연두색 우산을 떠올린다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나 또한 작은 박물관을 마련해두었던 적이 있다. 연인과 함께 했던 찰나의 기억들을 어울리는 멜로디와 함께 마음 속 상자에 담아두었는데, 가끔 꺼내어 들으면 하늘 아래 가장 행복한 남자가 되기도 하였고, 때로는 상심 탓에 잠 못 이루고 뒤척였었다. 문득 그가 가련하게 느껴졌다. 그저 물건에 집착하는 미치광이로 치부하기엔 첫사랑에 대한 그의 순정이 너무나 고통스럽고도 맑았기 때문이다. 어디가 사랑과 집착의 경계선인 것이며, 기준은 누가 정하는 걸까. 우리 인생에 단 한 순간이라도 그와 같이 뜨겁게 사랑했던 적이 있었는가. 규정하려 하면 할수록 생각이 꼬리를 물며 모든 것이 모호해져만 갔다. 세상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케말은 자신이 아주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말한다. 남들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 지 몰라도 퓌순이라는 여인을 사랑하기로 한 스스로의 ‘순수한’ 마음과 선택에 후회가 없다는 것이다. 두 가지 이유에서 나는 그가 부러웠다. 첫 번째로 그 과정은 너무도 험난했지만 인간의 인생에서 저토록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았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라 생각했다. 두 번째 이유는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자에 대한 부러움이다. 나라면 시벨과의 약속을 깨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퓌순을 찾아 나서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이 더 옳고 그른지의 문제가 아닌, 그저 모든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사랑에 충실한 모습 자체가 대단해 보였다.   

 

  케말의 사랑은 순수했다. 끝까지 진실된 사랑을 갈구하고 그 길에서 후회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순수’의 결정체인 박물관이,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고백하는 그의 모습이 이것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그가 우리에게 묻는다. 

 

  “지금 당신은 후회 없는 사랑을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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