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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F 브라질] 브라질 이민 다이어리

작성일2013.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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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기자단


 이과수(IGUACU) 커피 향이 호텔 방을 감싸 안는 늦은 밤, 머릿속에 한껏 널브러진 기억이란 녀석을 정리할 작은 일기장을 펼쳐본다. 밤의 상파울루는 짙은 커피 향만큼이나 깊다.

 타국에서 같은 국적의 어떤 사람, 아니 같은 대륙의 어떤 사람만 만나도 반갑기 그지 없는데, 피를 나눈 가족을 만나게 된다면, 과연 어떠한 기분이 들까. 2월 25일 저녁, 상파울루의 골목골목을 따라 한 가정 집에 도착했다. 그곳은 바로 아클리마썽(Aclimacao)에서 한인 이민 가정으로 살고 있는 나의 이모네 집. 문을 열자마자 우리를 맞이하는 이모부의 손에는 넘치도록 반가운 안녕이 깃들어 있었다.

 더듬더듬, 다시 상파울루의 골목을 지나 이모네 집 앞에 섰던 그 시간을 기억해 본다. 12층의 집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엘리베이터가 브라질의 아파트를 향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전혀 엘리베이터 입구처럼 보이지 않는 방문 같은 출입구는, 마치 9와 3/4 플랫폼을 지나는 해리포터가 된 마냥 흥미로운 시작이었다. 아파트 12층에는 단 한 가구의 집, 그러니까 이모네 집만이 자리잡고 있었다. 브라질 한인 이민 가정을 방문하는 발걸음이 설렘으로 가득했다.

 


 


 




 

 각종 케이크며 과일이며 양껏 펼쳐진 다양한 다과만큼이나 오가는 이야기도 다채로웠다. 이민 1.5세인 이모부와, 결혼 후 남미에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 이모의 이야기는 1977년부터 2013년에 이르렀다. 올해로 한인들의 브라질 이민역사가 50주년을 맞이하였으니, 이모부의 이민은 초기에 이루어진 편이었다.

 

 

 77년 당시 이모부는 부모님을 따라, 브라질이 아닌 파라과이에서 이민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브라질로 재 이민을 오셨다. 77년, 한 비행기를 타고 이민을 함께 떠나 온 가구의 수가 32가구. 이모부는 이들을 신선하고 재미있게 표현했다. 낯선 땅 남미로의 이민을 비행기에서 함께 시작한 관계, 사전에도 없는 ‘비행기 동창’이라고.

 “이민 1.5세는 개척 세대인 1세보다는 삶이 어렵진 않았어. 하지만 역시나 문화적인 격차에 부딪치는 고충은 있을 수밖에 없었지. 한국식 문화와 브라질식 문화의 기로에 서있었으니까. 예를 들면, 부모님 세대에게는 한국식 문화로 대하지만 우리 자식들에게는 서양문화에 가까운 브라질식 문화로 대해야 하는 문제 같은 것 말이야.” 그렇다. 여행이건, 이민이건, 어떤 문화들 사이의 기로에 선다는 것은 언제나 참 애매하고 불안한 일이다.





 2013년, 올해로 한인들의 브라질 이민이 50주년을 맞이하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한 다채로운 행사도 개최되고 있었다. 우리는 25일 한인성당에서 개최된 ‘브라질 이민 50주년 행사’에 참석했던 방송인 김흥국, 현숙, 남궁옥분 씨를 다음날 어느 한국음식점에서 만날 수 있었다.



 50년 전, 한국인들은 왜 브라질 이민행을 선택했을까. 1960년대 이후, 브라질로의 이민은 우리나라 정부에 의해 적극 추진된 일이었다. 1962년 브라질을 방문한 우리나라 이민관계 시찰단은 브라질 정부로부터 우리나라의 이민 30세대를 받아들이겠다는 약속을 받았고, 이에 따라 1963년에 17세대의 이민단이 상파울루에 정착하였다. 농업이민의 형태로 초기 이민을 시작한 한국인들은 점차 상파울루 등의 대도시에서 상업에 종사하기 시작하였고, 대부분은 의류 사업에 뛰어들었다. 상파울루의 대표적인 한인 거리인 ‘봉헤찌로(Bom Retiro)’는 브라질 최고의 패션단지인데, 이곳 의류 상점의 80%가 한인들이 운영하는 곳이다.



‘좋은(Bom) 안식처(Retiro)’라는 뜻의 유태인의 말, 봉헤찌로. 원래 봉헤찌로는 유태인의 거리였지만 한국인들은 과감히 이곳에서의 삶을 펼치기 시작했고, 현재는 완연한 한인타운을 형성했다. 이곳에서는 많은 한국인들과 한식 식당이나 슈퍼마켓을 만나며 한국을 느낄 수 있다.

 



 

 

 아클리마썽에서의 대화는 이민사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브라질에서의 삶 이야기로 이어졌다. 이모부와 이모는 자녀들을 한인 학교가 아닌 현지인 학교에 보냈다. 언어 교육의 측면이 가장 큰 이유였다. 아이들은 3개 국어를 구사하는데, 현지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익힌 포르투갈어, 한국인인 부모님 아래서 꼭 익혀야 했던 한국어 그리고 사교육을 통해 습득한 영어까지 포함된다. 언어의 장벽 앞에서 힘든 시간을 보낸 이민 1세나 1.5세와는 달리, 현지에서 태어난 이민 2세에게 언어의 장벽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2세들에게도 장벽은 있다.

 정체성의 문제가 그것이다. 10대 사춘기의 이민 2세들은 자신이 한국인인가 브라질인인가에 대한 고민의 시기를 겪고는 한다. 나의 두 사촌동생들은 이민 2세의 다른 특성을 보여주었다. 누나인 미나는 K-pop을 접하며 자연스럽게 한국문화와 한국어에 관심을 갖고 받아들이며, 모국어에 흥미를 느끼고 스스로 공부도 한다. 한국어 구사도 곧잘 한다. 하지만 동생인 지오는 우리말을 다 알아듣고 이해함에도 불구하고 말로 잘 사용하지는 않는다. 한국 문화에도 미나만큼의 관심을 보이지는 않는다고. 이는 비단 미나와 지오만의 문제일 뿐 아니라, 모든 이민 2세들의 공통적인 문제일 것이 분명하다. 이민자로서의 삶 속에서 만나게 되는 몇 가지 장벽, 방식은 모두 다르겠지만 한인들은 이 장벽을 각자의 방식으로 허물어뜨리며 극복하고 있었다.

 

 나의 가족을 비롯한 브라질의 많은 한인 이민자들은 한국 문화와 브라질 문화의 중간에 서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하거나 혹은 둘 다를 받아들이는 나름의 형태로 브라질에서의 삶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브라질에서 들여다 본 한인들의 삶의 모습은, 역시 한국인다운 강인함과 개척정신을 갖춘 당당한 모습이었다.

 이모부와 이모로부터 브라질 한인들의 이민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의 삶이 쉽지만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가족과의 짧은 만남은 아쉬움을 남겼지만 그보다 훨씬 큰 정을 느꼈기에 행복한 시간이었다. 일기장을 덮는 마음이 찻잔의 커피만큼이나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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