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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마르 시난, 그가 이룩한 이스탄불의 美

작성일2013.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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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기자단

 

  지난 6월 20일, 여름방학을 맞아 터키로 여행을 떠났다. 요르단에서는 터키 이스탄불까지 거리는 가깝지만, 이집트 상공으로 지나가야 해서 비행기로 약 3시간이 걸렸다. 이스탄불, 카파도키아, 윌루데니즈, 파묵칼레를 여행했지만, 이스탄불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미마르 시난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스탄불의 아름다움


    매년 터키를 여행하는 한국인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나 역시 방송에서 본 아름답고 신비한 터키의 매력에 빠져서 여행을 떠났듯이 말이다.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은 아시아와 유럽, 현대와 전통이 공존하는 도시이다. 또한 이슬람과 기독교의 문화가 공존하고, 수천 년의 역사와 유적을 가진 역사적인 도시이다. 이처럼 이스탄불은 다양성이라는 특징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을 주고 있다.  


  '이스탄불'을 생각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마주보고 서 있는 블루모스크와 아야소피아, 도시 어디에서든 쉽게 볼 수 있는 우뚝 솟은 첨탑을 가진 수많은 모스크, 도시를  가로지르는 보스포러스 해협, 그 위를 지나다니는 수상 택시와 선박, 관광객과 흥정하는 상인들로 분주한 시장, 화려한 톱카프 궁전과 돌마바흐체 궁전. 이렇게 오늘날 이스탄불에서 접하는 아름다움 뒤에는 미켈란젤로가 존경한 터키 건축의 거장 미마르 시난이 있었다.


 

 

△좌. 낮에 본 슐레이마니예 자미. 우. 밤에 본 슐레이마니예 자미(사진=심아영)


미켈란젤로가 존경한 인물, 미마르 시난

 

  비잔틴 제국에 이어 오스만 제국이 오늘날 터키를 지배하게 되었다. 술탄 슐레이만이 오스만 제국을 통치하던 16세기에 오스만 제국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오스만 제국의 법령을 정비하고, 군대를 확장하고, 경이로운 건축물을 많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때 경이로운 건축물들을 만들었던 사람이 바로 미마르 시난이다. 


  미마르 시난은 15세기 말에 오늘날 카이세리 부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서 자랐지만 1512년 예니체리 군대(오스만 군대가 기독교 가정의 젊은이들을 징집해서 군인으로 교육시키던 집단)에 들어간 뒤에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시난은 어려서부터 건축에 관심이 많아서 건축가를 꿈꿨지만, 60살까지 군대 생활을 해야하는 예니체리였기 때문에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이 처음으로 그린 설계도를 항상 지니고 다녔다. 그러던 중에 군대 기숙사를 책임지고 지어야 하는 임무를 받았다. 비록 군대 기숙사지만,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며 성공적으로 공사를 마쳤다. 그 후에도 건축 임무를 받으면 항상 완벽하게 수행했다. 


  

△좌. 슐레이마니예 자미 앞에 있는 미마르 시난 카페. 우 이스탄불이 한눈에 보이는 언덕에 있는 슐레이마니예 자미(사진=심아영) 


 

  이러한 그의 명성이 슐레이만 대제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슐레이만은 시난이 건축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고 특별히 건축가로 활동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 술탄 슐레이만은 인간적이고 사람의 능력을 중요시한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니체리 중에서 시난처럼 능력을 인정받아 군인이 아닌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있던 사람들은 1%에 불과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의 건축가를 꿈꿨던 시난에게 슐레이만은 자신의 꿈을 이루게 해준 고마운 은인이었다. 하지만 술탄 슐레이만은 시난에게 건축가로 활동하는 것을 허락했음에도 예술 작품을 만드는 것은 금지했다. 오로지 국가를 위해서만 그의 능력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이었다. 그래서 미켈란젤로가 존경한 미마르 시난이었지만 특별한 예술작품은 없었던 것이다. 미마르 시난은 살아생전 모스크 81개, 학교 55개, 목욕탕 22개, 다리 2개 등 330여개의 건물을 지었고, 알려지지 않은 건물을 포함하면 1000개에 다다른다고 한다.  


  이처럼 미마르 시난의 재능을 인정하고 그에게 건축가로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슐레이만 대제 덕분에 오늘날 이스탄불의 모습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시난은 평생 그에게 감사하며 살았으며, 정말 그의 명령대로 예술 작품을 짓지 않았다. 그리고 술탄 슐레이만 대제를 위해 이스탄불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그의 작품 중 최고로 손꼽히는 슐레이마니예 자미를 만들었다. 미마르 시난도 슐레이마니예 자미에 대해 애정이 컸기 때문에 죽은 뒤에 묻힐 수 있도록 자미 북쪽에 자신의 무덤도 만들었다.


 

 

△시난의 은인 슐레이만 대제의 딸인 미흐리마 공주(사진=Wikipedia)

 


미마르 시난이 평생 사랑한 여자, 미흐리마 공주  


  미마르 시난은 평생 한 여자를 사랑했다. 그녀는 바로 자신의 은인인 슐레이만 대제의 딸, 미흐리마 공주였다. 노예와 공주라는 신분차이 때문에 미마르 시난은 그녀에게 쉽게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다. 이러한 그의 마음을 알았던 슐레이만 대제는 미흐리마 공주와 미마르 시난의 결혼을 허락했다. 미마르 시난의 인품을 높이 샀고, 슐레이만 대제에게 노예 출신인 아내가 있었기 때문에 신분 차이에 대해 관대했기 때문이다.  


  결혼 허락을 받은 시난은 공주를 위해서 멋진 프로포즈를 준비했다. 바로 자신이 가장 잘 하는 '건축'을 이용해서 프로포즈를 준비한 것이다. 이스타불 아시아 지구 해변가에 아름다운 자미를 짓고, 공주의 이름을 따서 '미흐리마 술탄 자미'라고 이름을 지어서 그녀에게 선물 한 것이다. 이 자미에는 첨탑이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시난 자신을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공주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둘이 함께 평생 이 자미에서 기도하고 싶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미마르 시난이 공주를 위해 이렇게 아름다운 프로포즈를 준비하는 사이에 라이벌이 나타났다. 바로 그 당시 유명했던 뤼스템이라는 재상이 미흐리마 공주에게 청혼했기 때문이다. 시난과 뤼스템 사이에서 고민하던 슐레이만 대제는 결국 뤼스템에게 공주를 시집보냈다. 미흐리마 공주의 마음 속에도 미마르 시난이 있었음에도 말이다. 뤼스템에게 공주를 빼았겼지만 시난은 슐레이만 대제를 결코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주의 행복을 빌어주었다.  



 

△공사중이어서 들어갈 수 없던 미흐리마 술탄 자미 뒤쪽 언덕에서(사진=심아영)


 

  미마르 시난이 90세가 되었을 때, 그는 4년에 걸쳐서 공주를 위해 다른 자미를 지었다. 자신이 죽고 나서도 그녀가 행복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공주가 자주 올라가는 언덕에서 잘 보이는 위치에 자미를 지었다. 하지만 이 자미는 미흐리마 술탄 자미와는 다르게 첨탑이 하나였다. 바로 홀로 남은 미마르 시난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말년에 미마르 시난은 공주를 위한 두 번째 자미를 위해 천문학도 공부했다. 그녀의 생일이자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춘분인 3월 21일에 그녀 만을 위한 특별한 선물을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매년 3월 21일에 미흐리마 공주를 위해 시난이 지은 한 쪽 자미의 첨탑에는 태양이, 다른 자미의 첨탑에는 달이 걸리는 신기한 일이 일어난다. 자신이 죽고나서 홀로 남은 공주가 이것을 볼 때 만큼은 근심, 걱정 없이 행복하길 바라는 미마르 시난이 마음이 담긴 특별한 선물이었다.  



 

△미흐리마 공주에게 프로포즈를 하기 위해서 지은 미흐리마 술탄 자미(사진=심아영)


 

  위대한 건축가이자 평생을 한 여자만 바라보며 진심으로 사랑한 로맨티스트 미마르 시난은 오늘날 여자들이 바라는 그런 남자가 아닐까 생각된다. 시난과 공주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해서 슬프지만, 그 덕분에 시난이 더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이 둘의 사랑이야기 때문인지, 미흐리마 술탄 자미를 보면 아름답지만 이상하게도 슬픔이 묻어나온다.  


 

 

△좌. 입구를 찾기 힘든 뤼스템 파샤 자미. 우. 앞은 뤼스템 파샤 자미, 뒤는 슐레이마니예 자미(사진=심아영)


 자신의 사랑을 빼앗은 원수 뤼스템 재상까지 사랑한 미마르 시난

 

  이스탄불에 있는 이집션 바자르 근처 재래시장 중심에 '뤼스템 파샤 자미'라는 모스크가 있다. 바로 미마르 시난이 자신이 사랑한 미흐리마 공주를 빼앗은 원수인 뤼스템 재상을 위해 지은 것이다. 평소에 인품이 좋기로 소문난 시난은 뤼스템과 화해를 하고 싶어서 그를 위한 자미를 짓기로 결심을 했다. 미흐리마 공주의 행복을 진정으로 바라던 시난이었기 때문이다. 


 

△좌. 뤼스템 파샤 자미에서 내려다본 시장. 우. 외부는 굉장히 소박한 뤼스템 파샤 자미(사진=심아영)


 

  하지만 왜 시끄럽고 복잡한 시장 중심에 모스크를 지었을까 바로 이 자미는 뤼스템를 위해 시난이 슐레이만 대제의 재정적 도움 없이 오로지 자신의 사비를 이용해서 짓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우선 1층에 상가를 지은 뒤에 상인들에게 임대료를 받아가면서 차근 차근히 뤼스템을 위한 자미를 만들 준비를 했다. 그래서 이 자미는 완성하는 데 1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외부는 다른 자미에 비해 소박해 보일 수 있지만 내부는 다른 자미보다 훨씬 더 화려하다. 비싸기로 소문난 이즈니크 타일을 이용해서 모든 내부 벽과 외부 벽을 장식했기 때문이다. 자미가 완성된 후에 미마르 시난과 뤼스템은 이곳에서 극적인 화해를 했다고 전해진다. 


 

△깨진 이즈니크 타일을 이용해서 완성한 한쪽 벽(사진=심아영) 


 

  그런데 외부 벽 중에서 특별한 하나의 타일 벽이 있다. 깨진 이즈니크 타일을 이용해서 모자이크 처럼 벽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이즈니크 타일은 매우 비쌌지만 외부 충격에 약했기 때문에 잘 부숴졌다. 작은 것도 소중했던 시난은 이러한 깨진 조각을 모아서 하나의 예술 작품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뤼스템은 이 벽을 보고 기분이 나빠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살아생전 단 두 번만 이곳에서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슐레이마니예 자미 앞에 있는 미마르 시난 카페. 이스탄불을 한눈에 볼 수 있기 때문에 연인들에게 인기가 많다.(사진=심아영)

 

미마르 시난을 알고 난 뒤, 다시 보이는 이스탄불


  '아는만큼 보인다.'라는 말처럼 미마르 시난을 알고나서 이스탄불을 다시 보면 그 감회가 새롭다. 그의 이야기를 알지 못했다면 이스탄불이 지금 느끼는 것보다 덜 아름답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가 만든 1000여개의 건물 덕분에 오늘날 관광객이 많이 찾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스탄불의 모습이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리고 미마르 시난이 예술작품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미켈란젤로만큼 세계적으로 유명하지는 않지만, 어느 시대나 사회에서 숨은 공신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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