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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와 야망의 대명사, 서태후를 아시나요?

작성일2013.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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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기자단

 

 

 

 

서태후는 누구인가  

 


안휘성의 몰락한 관리 출신인 서태후는 어린 시절을 매우 가난하게 보냈다. 그녀는 빈곤을 벗어나고 출세하기 위해 궁녀가 되고 싶었고, 16세가 된 1851년, 드디어 궁녀로 발탁되어 자금성에 입성한 서태후는 자신의 첫 번째 야망을 이루었다.
화려한 언변을 지녔을뿐 아니라 젊고 아름다웠던 서태후는 환관의 관심을 사게 되고 곧 황제(함풍제)의 눈에 들어 황제의 유일한 혈육인 아들 동치제를 낳게 된다. 궁녀에서 의귀비로 신분이 상승한 그녀는 서예에 조예가 깊어 대신들이 황제에게 주청하는 글에 함풍제가 구술로 말하면 그녀가 대필 함으로써 정치에 첫 발을 들이게 된다.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의 북경 침략으로 피난길에 오른 함풍제가 요절하자, 서태후는 신유정변을 일으켜 반대하는 대신들을 능지처참으로 숙청한 뒤, 자신의 아들인 6살배기 동치제를 황위에 앉혔다. 허수아비 황제를 앞세운 기나긴 수렴청정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사치와 향락을 즐기다

 

그녀는 집권 후 47년간 황제 위에 군림하면서 어릴 때 가난했던 것에 한 풀이 라도 하듯 원 없이 사치와 향락을 즐겼습니다. 그녀는 매 끼마다 128가지의 음식을 먹었는데, 이는 당시 중국 농민의 일년 치 식량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서태후는 식탁과 식기까지도 모두 비취로 만든 것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매일 수라상을 먹는 그녀였지만 독살에 대한 두려움에 늘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알아 차릴 수 없도록 한 음식을 절대로 세 번 이상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건강을 위해 매일 아침 모유를 마셨는데, 서태후에게 모유를 대령하기 위하여 뽑힌 젊고 아름다운 귀족여인들은 매일 감시를 받으며 모유를 짰다고 합니다. 

 


▶ 서태후의 화려한 의복과 장신구들

 

서태후의 의복에 대한 사치는 패리스 힐튼도 울고 갈 정도입니다. 그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갈아 입었는데 옷마다 비취 구슬과 진주를 매달았으며 머리에도 항상 비취나 진주 같은 보석들로 장식을 했습니다. 그녀의 의복은 3000벌이 아닌 3000상자나 되었습니다. 팔찌와 반지는 물론이거니와 손톱까지 매우 길게 길러 비취 장신구를 달았습니다. 그녀는 비취로 만들어진 악기로 연주하는 악사를 둘 정도였습니다. 

 

사치의 절정, 이화원

 

서태후의 사치품들은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곳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중국의 대표적인 문화유산 이화원입니다. 본래는 일시적인 피서와 요양을 목적으로 건설하였지만 나중에는 각종 전각(殿閣)과 사원을 추가하여 본격적인 국사를 볼 수 있는 궁전 형태로 변모시켰습니다. 

 

 ▶바다와 같이 광활한 이화원의 곤명호 

 

이화원에는 거대한 인공호수와 60m 높이의 인공산을 중심으로 각종 전각과 사원, 회랑 등 3000여 칸의 전통 건축물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총면적의 3/4을 차지하는 거대한 인공호수 쿤밍호(昆明湖) 입니다. 쿤밍호는 중국 항저우에 있는 시호를 본 따 만들었는데요, 기자도 이화원에 몇 번 가 보았지만 호수라기보다는 바다처럼 광활하여서 인공으로 만들었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 당대 미남들을 잡아다 가두었던 이화원의 남호도

 

이화원에는 남호도 라는 조그만 인공섬이 있는데요, 이 섬은 젊은 날에 과부가 된 서태후가 잘생긴 남자를 잡아다 가둬두는 용도로 사용한 섬이라고 합니다. 매일 젊은 남자와 잠자리를 갖고 남자가 서태후와의 잠자리를 발설할까 모두 사형시켰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도 북경에는잘생긴 남자의 씨가 말랐다는 속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서태후는 청일전쟁 중에 함대를 만들 군비를 빼돌려 이화원 치창에 사용하였습니다. 전쟁 중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처소 꾸미기에 여념이 없던 그녀의 사치가 오늘날엔 중국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이 되었으니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르겠네요.

서태후의 유물들   

 


▶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상아로 조각한 찬합과 요강, 비취배추, 장식함

 

서태후의 사치와 향락에 탐닉은 백성을 굶주리게 했을 뿐만 아니라 곧 청조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게 했습니다. 현재 중국의 시진핑 정부는 서태후 시절의 역사를 교훈 삼아 그 어느 때보다 부패척결에 힘쓰고 있는데요, 이를 계기로 중국에서도 투명하고 청렴결백한 정치 문화가 자리잡을 수 있길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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