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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인근 동네 이름의 유래를 알아보자

작성일2017.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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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손영래
학교로 버스를 타면서 올 때, 배달 음식을 시켜 먹을 때, 성적표가 날아왔을 때, 그리고 군대 간 친구가 동아리방으로 보내온 편지에서 우리가 공통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OO동', 우리 학교가 속해져 있는 동네의 이름이다. 이 지명의 유래는 어떤 것일까? 지명이 품은 역사를 알아보자.


숭실대학교, 동작구 상도동 - '상여꾼이 모여 산 마을'





상도동은 지역 일대에 장례를 치를 때 상여를 메주는 ‘상여꾼’이 집단으로 살았다 하여 ‘상투굴’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되었다. 그렇기에 이 주변에는 과거 묘소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숭실대학교와 봉천동을 연결하는 ‘살피재 언덕’은 수목이 울창하여 도둑이 많이 출몰하였기 때문에 이 언덕을 넘기 전에 사람들이 산적을 피해서 잘 살펴보면서 지나가라는 뜻에서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 조선 후기 상여꾼들 (출처: 동작뉴스 http://m.dongjaknews.com/9122)
▲ 조선 후기 상여꾼들 (출처: 동작뉴스 http://m.dongjaknews.com/9122)

가까운 장승배기는 과거 울창한 숲이 있어 낮에도 맹수가 나타나는 무서운 곳이었다. 어느 날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에 가다가 이곳에서 쉬어가야 했었다. 하지만 이곳의 무서운 분위기 때문에 정조는 맘 편히 쉬지 못하고 지나갔다고 한다. 후에 정조는 무서운 분위기를 억누르기 위해서 “이곳에 장승을 만들어 세워라. 하나는 장사 모양을 한 남상 장승을 세워 천하대장군이라 이름을 붙이고 또 하나는 여상 장승 지하여장군을 하여라.”라고 명했고, 이때부터 장승배기라는 지명이 붙게 되었고 정조는 아버지의 묘소를 참배하러 가는 길 오는 길에 이 장승 앞에서 어가를 멈추고 쉬어 갔다고 한다.


▲ 매년 10월 시행되는 장승배기의 장승제 (출처: 동작신문 http://www.thedj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598)
▲ 매년 10월 시행되는 장승배기의 장승제 (출처: 동작신문 http://www.thedj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598)

이곳의 장승은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으나 이후 시민들의 노력으로 복원이 되었다. 정조의 역사적 발자취가 남아있는 장소에 의미를 부여하고, 후손에게 아름다운 유산을 남기기 위해서 동작구에서는 91년부터 매년 10월마다 ‘장승배기 장승제’가 시행되고 있다.


동국대학교, 중구 장충동 - '조선말의 순국선열들의 제단이 있는 곳'





장충동의 동명이 유래된 ‘장충단’은 1900년 고종의 조칙에 의해 남소영이 있던 장소에 창건한 단이다.


▲ 장충동 공원에 위치한 장충단 비
▲ 장충동 공원에 위치한 장충단 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된 문화재인 ‘장충단 비’는 명성황후 민씨가 시해당한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일본인을 물리치다 순직한 여러 대신과 장졸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1900년 장충단을 건립하면서 함께 세웠던 비석이다. 이후 고종은 임오군란, 갑신정변, 춘생문 사건 때 순국한 문관들도 더해 장충단의 신위를 증가시켰다. 이후 매년 이곳에서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며, 군악을 연주하며 제사는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하지만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이후 장충단은 폐사되었다. 일제는 1920년 후반부터 이곳 일대를 장충단 공원으로 부르며 벚꽃을 심고 휴양 시설을 설치하였다. 또한, 1937년에는 안중근 의사에 의해 죽은 이토 히로부미의 혼을 달래기 위한 박문사라는 절을 인근에 세워 민족정기 말살정책에 더욱 열을 올렸다. 광복 이후 박문사는 철거되었으며, 한국전쟁으로 장충단의 사당과 부속 건물이 파괴되면서 지금은 장충단 비만 남아있다. 현재는 서울시 중구청의 주관으로 매년 10월 8일 장충단 제가 장충단 비 앞에서 행해지고 있다.


경희대학교, 동대문구 회기동 - '연산군의 어머니 윤 씨의 묘가 있던 곳'





회기동은 조선 시대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 씨의 묘소인 회묘가 있던 자리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회묘의 주인공인 윤 씨는 후궁으로 들어가 연산군을 낳고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연산군의 생모 윤 씨는 투기가 심하여 1480년 폐출되어 서인이 되었다. 성종은 윤 씨를 다시 궁으로 불러들이려 했으나, 윤 씨에 대한 모략은 계속되었고 결국 1482년 윤씨에게 사약을 내릴 것을 허락하였다.


▲ 과거 회묘가 있던 자리, 현 경희의료원
▲ 과거 회묘가 있던 자리, 현 경희의료원

성종은 폐비 윤 씨의 묘소를 ‘윤씨지묘’라 하고 절기마다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이후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어머니 윤 씨가 주위의 참소로 사약을 받았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분노한 연산군은 갑자사화를 일으켰고 많은 이들을 처형하였다. 한편, 윤 씨를 제헌 왕후로 추존, 회묘를 회릉으로 고치고 모든 석물을 왕릉과 같이 꾸몄다.


▲ 고양시로 이전된 회묘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고양시로 이전된 회묘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러나 연산군의 폐위 후 회릉은 다시 회묘로 격하되었다. 현재 회묘는 경희대학교가 옮겨 오면서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의 서삼릉으로 이전되었다. 또한 회묘동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묘(墓) 자가 좋지 않다고 여겨져 묘를 기(基)로 바꾸어 회기리가 되었고 1946년 일제식 동명을 우리 식으로 고치면서 회기동이 되었다.


한양대학교, 성동구 왕십리 - '북서쪽으로 10리를 더 가서 궁궐을 짓거라'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뒤 무학 대사를 불러 선생으로 삼았고, 무학 대사에게 수도가 들어설 자리를 알아보라고 명령하였다. 왕의 부름을 받은 무학 대사는 먼저 충남 공주로 내려가 계룡산을 점 찍어 둔 다음 그곳을 ‘신도’라 이름을 짓고 착공을 하였다.

하지만 이성계의 꿈에서 어느 신령이 나왔는데 그 신령은 ‘계룡산은 당신이 머물 자리가 아니니 옮기라’고 했고, 태조는 무학 대사에게 공사를 중지하고 다른 곳을 알아보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무학 대사는 서울의 여러 곳을 헤매다 북한산의 꼭대기에 올랐는데 이때 왕십리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무학대사가 산에서 내려와 그곳을 찾으려고 했으나 꼭대기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그곳을 찾기가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

계속 길을 헤매다가 그 부근에 다다랐을 때 무학 대사는 이미 지쳐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잠시 그 자리에서 휴식을 하고 있을 때, 어느 허름한 차림의 노인이 황소를 타고 나타나서 무학대사에게 말하기를 “이놈, 네가 그 능력으로 궁터를 얻으려 했느냐? 이곳은 구릉지이기 때문에 서울의 궁궐 자리가 되지 못하니 이곳에서 서북쪽으로 10리만 더 가보거라. 네가 찾던 자리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유유히 사라졌다. 이에 무학 대사는 노인의 말을 따라 서북쪽으로 10리를 더 갔고, 그곳에 경복궁이 세워졌다.


▲경복궁의 전경 (출처: 문화재청)
▲경복궁의 전경 (출처: 문화재청)

이후 무학 대사는 그 노인을 찾기 위해서 노력을 했지만 찾지를 못하였고 노인이 길을 알려준 자리에서 경복궁 궁터까지 정확히 10리가 떨어져 있다고 해서 ‘갈 왕’을 넣어 ‘왕십리’라고 이름을 붙이게 됐다고 한다.


마무리


지금까지 4곳의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우리가 매일 지나는 그 동네들은 그곳이 겪었던 역사와 이야기들이 그대로 남아 동명이 되었다. 우리가 사는 동네는 어떤 의미를 품고,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을까, 우리 주변의 역사에 관해서 관심을 가져본다면 집과 학교가 조금 더 새롭게 느껴지지 않을까?


영현대기자단14기 손영래 | 숭실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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