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퓰리처가 평가하지 못한 종군기자 - 로버트 카파

작성일2010.08.25

이미지 갯수image 14

작성자 : 기자단

 

 

 

사진 전시의 새 장 열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인기리에 전시 중인 퓰리처상 사진전. 

전시 중인 사진들은 20세기를 생생하게 담은 사진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풍경이나 밝은 느낌의 사진보다 각국의 내전등 전쟁을 생생하게 담은 전쟁 사진이 주를 이루고 있다. 

 

 

비록 퓰리처상은 수상하지 못했지만, 보도사진 특히 전쟁사진에 있어 위대한 업적을 남긴 한 사람이 있다. 세계적인 보도사진 작가 그룹인 매그넘의 창시자이자, 사실적 증언을 위한 투철한 기자정신을 뜻하는 "카파이즘"의 주인공 로버트 카파를 소개하고자 한다.

 

 

 

 

 

 

 

 

 

1913년 10월 22일

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바로 1년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양복점을 운영하는 가난한 유태인의 아들이 태어난다.
이때부터 그와 전쟁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 것일까

 

1931년에는 학창시절 좌익학생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헝가리에서 추방돼 베를린으로 건너간다. 프리드먼은 그곳에서 사진 통신사인 데포트(Dephot)의 암실 조수로 취직하면서 사진기자의 길로 접어든다. 가난한 유대인 젊은이에게 사진기자는 꽤 괜찮은 직업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해 12월, 망명중인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의 코펜하겐 강연을 취재한다. 이 때 찍은 사진들로 인해 정식 사진가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러던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베를린을 떠나 부다 페스트를 거쳐 이번에는 파리로 건너간다.  이듬해에는 세 살 연상의 공산주의자 이자 사진기자 게르다(Gerda Pohorylle)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카파는 이후에도 애인이 있었으나 다른 사람들에게 부인이라고 알리며 가장 사랑했던 사람은 게르다였다고 전해진다.

 

 

 

 

 ▲ 게르다(좌)와 로버트 카파(우)

 

 

 

1936년에는 사진을 팔아 돈을 벌기 위해 ‘로버트 카파’라는 가공의 미국인 사진가 행세를 시작한다. 이때부터 카파라는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게르다는 프리드먼이 찍은 사진을 성공한 사진가 로버트 카파가 찍은 것으로 위장해 언론사에 비싸게 판매한다. 그러다가 프리드먼은 로버트 카파로, 게르다는 게르다 타로(Gerda Taro)로 완전히 이름을 바꾼다.

 


그 해 8월, 둘은 스페인으로 건너가 인민 전선파 측에서 스페인 내전을 취재하기 시작한다. 다음 달인 9월에 코르도바 전선의 창호에서 뛰쳐나온 인만전선파 병사가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지는 순간을 담은 사진이 미국의 화보잡지 <라이프>에 소개되면서 카파의 이름이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다.

 

 

 

 

▲ 로버트 카파의 대표작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Spanish Loyalist at the Instead of Death)`

 

 

이 사진으로 카파는 세계적인 사진 기자로 명성을 얻었지만 결과적으로 큰 것을 잃고 말았다. 사랑했던 게르다가 스페인 내전 중 사망한 것이다. 그와 게르다가 아군 진지를 촬영하던 중, 전선에서 후퇴해 온 아군 전차가 촬영 중인 게르다를 미처 발견하지 못해

눈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 그때 카파는 얼이 빠져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전쟁이구나"

 

그와 절친한 피카소, 장 르느와르, 말로, 니생 등에 의해 정성껏 장례를 치뤘지만 게르다의 죽음에 상심한 카파는 반 달 동안 숙소에 엎드려 계속 울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평생동안 독신으로 지냈다. 새로운 사랑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이후 카파는 2명의 애인을 만난다) 그도 그에게 닥칠 운명을 알았던걸까

 

 

 

 

 

 

 

현대 전쟁사진에 있어 카파를 빼고 이야기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그는 스페인 내전을 비롯해, 2차 세계대전, 중일전쟁, 이스라엘의 독립전쟁, 인도차이나(베트남 전쟁) 등 총 5회에 걸쳐 종군기자로 활약하며 생애 많은 부분을 전쟁에서 보냈다. 그가 유일하게 취재하지 않았던 전쟁이 한국전쟁이다. 그때 그는에는 잠시 카메라를 놓고 쉬고 있었다고 한다.

 

 

스페인 내전 후 1938년 중국에서 6개월간 중일전쟁을 취재한 카파는 1939년 스페인으로 돌아가 내전의 마지막을 취재한다. 그러던 그해 9월, 2차 대전이 발발하자 더 이상 유럽에 있을 수 없었던 카파는 미국으로 건너가 허밍웨이, 카우보이, 미식축구 등 미국을 상징하는 것들을 촬영한다. 그 후 1941년 미국잡지 <콜리어스>의 의뢰를 받고 대서양을 건너 영국으로 가 연합군의 다양한 활약상을 취재했다.


또 1943년 북아프리카 공략, 시칠리아 공략, 나풀리 해방을 거쳐 이탈리아 반도 전투를 취재했으며 1944년 6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종군기자로 참가했고, 8월에 연합군의 파리 수복을 취재했다.

 

▲ 1945년 4월 18일 라이프치히에서 전쟁(2차 세계대전)이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한 한 미국 병사가
갑자기 날아온 저격병의 총알을 맞고 쓰러진 사진. 카파는 이 사진이 자신의 사진 중에서 가장 비통한 사진이라고 했다.

 


1945년에는 미국공수사단과 함께 낙하산을 타고 독일로 침투해 연합군의 라이프치히, 뉘른베르크, 베를린 함락을 보도했으며 1947년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데이비드 세이무어 등과 함께 보도사진 통신사인 <매그넘>을 설립한다. 매그넘은 현대 사진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사진가 집단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보도 사진가들만으로 구성된 엘리트 집단이었다. 47년은 존 스타인벡과 함께 소련 방문한 해이기도 하다.

 

 

 

Robert Capa - Pablo Picasso

▲피카소와 그의 가족들

1949년과 51년에는 피카소의 가정생활을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 평화는 잠깐이었다. 1948년부터 50년까지는 이스라엘 독립전쟁을 취재하였고 1954년 풍물사진 촬영차 일본에 가 있던 중 <라이프>지의 요청을 받게 된다.

 

 

 

카파의 사진 중 특히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오마하 해변에서의 사진은 카파가 아니면 탄생할 수 없는 사진이었다. 흐린 날씨에 병사의 90%이상이 사망한 전투에서 그는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는 위기를 수차례 넘겼다.

 

그의 책에 나오는 표현대로 해안선을 따라 죽은 자들만이 파도를 따라 넘실거렸고, 그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바로 옆에서 병사들의 살덩어리가 조각나며 그의 카메라에 들러붙었다고 한다.

 

당시 <라이프>지는 카파의 사진만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 때 카파가 찍은 사진은 총 106장이었으나 <라이프>암실직원의 실수로 대부분 소실되고 10장 정도만 남는다. 이 사진들은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라는 캡션을 달고 <라이프>에 실려 화제가 됐다. 상당히 흔들려서 사진이 떨린 상태이고 초점도 맞지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당시의 절박했던 상황을 더 절실히 보여주고 있기에 아직도 세계대전 사진 중 최고의 사진으로 평가받고 있다. 

 

 

 

▲ The landing at Normandy, 잡지에서는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라고 캡션을 달았다.

 

 

 

▲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초반부에 나오는 전투장면은 카파의 사진을 통해 재구성 되었다고 한다. 날씨가 흐리고 화면이 흔들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가게 된 베트남, 1954년 5월 25일 카파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은 ‘군인들의 뒷모습’ 이었다. 베트남의 호치민과 프랑스 군과의 전투였다. 베트남의 남딘 마을에서 타이빈을 향해 걸어가는 프랑스 군인들의 뒷모습이 카파의 사진기가 본 마지막 장면이다. 
 

▲ 사망하기 직전 찍은 군인들의 뒷 모습

 

 

카파는 행군 중에 왼손에 카메라를 쥐고 지뢰를 밟고 말았다. 지뢰에 폭사 한 것이다. 뒤에서 지뢰가 터지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은 카파가 그 폭발 속에 있는 줄도 모르고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젠장, 저 장면이 카파가 원하는 사진인데.”  
 

 

 

 

 

순식간에 터지는 지뢰처럼, 카파의 인생은 끔찍한 전쟁과 고통의 순간을 찍어낸 찰나의 인생이었다.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스타인벡은 그를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수 많은 전쟁터를 누볐다. 그 곳에서 어느날 갑자기 불려온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의 품에서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에서 사라져가는 현장을 지켰으며 그들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그의 책 는 종군기자를 꿈꾸었던 많은 젊은 사진작가들에게 바이블이 되었으며, 그의 너무 이르고 극적인 죽음은 그를 종군기자의 신화가 되게 만들었다.

 

이제 종군기자들은 카파처럼 그들의 생각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때라도 언론과와 정부의 권력에 맞서 싸우려 든다. 자기희생과 위험을 무릎 쓴 취재 정신, 바로 카파의 정신이었던 카파이즘(Capaism)이다.

 

 

로버트 카파의 사진은 조작이라는 주장이 많다. 최근까지도 `어느 인민병사의 죽음`의 경우는 연출이라는 주장이 계속 되고 있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그의 사진이 너무나 믿을수도 없게 사실적이고 시사하는 점이 많으며 현재까지 종군기자뿐만 아니라 많은 기자들의 롤모델이 되었기에 그가 떠난지 반 세기가 지난 이후에도 그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되는 것이 아닐까

 

 

 

 

 


해당 콘텐츠는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받는 저작물로 영현대 저작권이 있습니다.
                                            해당 콘텐츠의 상업적 이용을 금지하며, 비영리 이용을 위해 퍼가실 경우 내용변경과 원저작자인 영현대 워터마크 표시 삭제는 금하고 있습니다.

SNS 로그인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로그인할 계정을 선택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