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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話가 된 화가

작성일2011.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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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기자단

 

최정규

서울디지털대 회화과 11


최정규씨의 작업실을 찾았다. 마포구 주택가에 있는 화실은 지하에 있었다. 내려가는 길에 습한 냄새가 훅 끼쳤다. 습도 조절기와 히터가 나란히 켜져 있는 방 오른쪽에는 문근영 그림이, 왼쪽에는 노무현 그림이 걸려 있었다. 화실 한쪽 구석에서 대학생으로 보이는 문하생이 자신의 사진을 보며 자화상을 그리고 있었다. “이번에 수상하신 2010년 자화상 그림을 봤어요. 2009년의 것도 봤고요.” 기자가 말했다. “2011년 자화상도 있습니다. 아직 90퍼센트밖에 완성 못했지만요.” 수초간 머뭇거리고 그는 빠르게 이었다. “뭐, 보여드려도 별 문젠 없을 겁니다.” 이젤이 돌았다. 피눈물 고인 흰자위에 머리에서부터 시뻘건 피가 줄줄 흐르는 그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사진 나현수 프리랜서

 

 

미완성된 2011년 자화상 앞에 섰다. 과거의 고통을 기억하면서 변하지 않고 그리겠다는 다짐이라고, 그는 말했다. 파란 얼굴이 그려진 2008년 자화상의 제목은 ‘I AM MONSTER.’ 2009년에 그린 초상화는 죽음에 가장 가까이 있을 때의 그림이다. ‘나에겐 아무리 좋은 일이 일어나도 늘 이렇게 어둠이 드리워져 있다’는 뜻으로 얼굴의 좌우 명암이 극명하게 갈리게 표현했다. 2010년, 아사생천에 그려낸 초상화 속 눈동자는 결연하다. 절망을 걷어내고 살아보겠다는 의지다.

최정규씨는 이 초상화로 올 초 열린 서울디지털대학 미술상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신인 작가가 됐지만 그는 미술학원에 다닌 적도, 대학에 다닌 적도 없다. 화가가 되기 전 그가 거친 직업은 30개가 넘는다. 15살부터 타이어공, 배달꾼, 군 하사관, 건설현장 일용직, 도배사, 일식집 주방 보조원, 물류 운반 직원 등을 전전했다. “남들은 부르기 편하게 ‘불우했다’고 표현할 수 있겠지만 학교나 학원을 못 가는 대신 다른 걸 많이 배웠으니까요….”

 

스칼렛 요한슨 연필화, 첫 연습작, 2006

 

‘I AM MONSTER’ 116 x 72.7, oil on canvas, 2008

 

 

‘Self portait’ 135 x 100, oil on canvas, 2010

 

 

재능

봉제 공장에서 일하는 어머니와 공장 옥상에 슬레이트를 친 가건물에 살았다. 공부는 한 적 없지만 어릴 때부터 그림을 곧잘 그렸다. 달력을 뜯어 뒤편에 연필로 그린 태권브이 그림에 보는 아이들마다 감탄했다. 육성회비 2000원을 못낸 그를 질질 끌어내 양쪽 뺨을 때리던 담임선생님은 그가 그려 낸 그림을 감췄다. 미술상은 반장에게 돌아갔다. ‘돈도 안 내는 놈은 나가라’고 선생님은 말했다. 어머니는 그의 그림을 모두 찢었다. ‘그 좋은 손재주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재단사가 돼라’고 어머니는 말했다. 초등학교 5학년 이후로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89년, 산업체 야간고등학교에 입학하며 돈을 벌었다. 세 번째 직장은 자동차 부품 공장이었다. 하루 일당이 6000원이었다. 자동차 스프링을 나르고 구멍을 냈다. 하루에 천 개를 옮기고 나면 숟가락을 들 수 없었다. 95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하사관이 됐다. 같은 시기에 고등학교 친구 2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참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죠.” 그가 말했다. 그는 참는 쪽이었다. 아버지의 부재와 세상에 대한 원망으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려고 심리학 공부를 시작했다. 관심이 가는 주제를 읽다 영역을 확장해나가는 식이었다. 영어와 문학, 물리학 독학이 이어졌다.

2000년, 중사로 제대 후 도배사를 할 때가 그때까지의 인생에서 가장 풍요로웠다. 눈썰미가 있고 손재주가 뛰어난 그는 남들보다 빨리 일을 배웠다. 당시 연봉이 6천만원 정도였다. “어머니에게 좋은 걸 많이 해드렸어요. 제 불행도 끝난 줄 알았죠” 그러나 잠깐이었다. 그는 믿었던 동료의 배신으로 수천만원을 날리고 일식집에 주방보조원으로 취업했다.

 

 

노력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건 요리를 시작한 2005년부터였다. 일식집에서 동료와 함께 있던 중 인터넷에서 마치 사진처럼 그려낸 인물화를 보고 그는 ‘하루만 연습하면 저 정도 그릴 수 있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말도 안 된다고 했지만 그는 금세 연필로 스칼렛 요한슨을 그려냈다. 그림을 본 동료가 말했다. “이렇게 잘 그리는데 왜 미대를 안 갔냐” 그가 말했다. “왜겠어요. 형도 돈 없어서 여기 왔잖아요. 다들 똑같지 뭐.”

얼마 뒤 인터넷을 검색하던 그는 자신이 세밀하게 묘사하던 그림이 ‘극사실주의’로 불린다는 것을 알았다. 그림을 배우고 싶었다. 화실에 나갔다. 원장이 조언했다. “입시부터 준비해 대학에 가세요.” 그럴 형편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자 원장은 말했다. “그럼 미술계 물 흐리지 말고 취미로나 하세요.”

청담동 갤러리에 들렀다. ‘극사실주의 회화전’이 열리고 있었다. 물감이 쌓인 순서와 그린 방법이 보였다. 작품을 보면서 ‘저 정도는 나도 그릴 수 있다’ 생각하고 있는데 옆에서 ‘1천만원밖에 안 하네’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림을 그려서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일식집에서 준 보너스 20만원으로 물감을 샀다. 3개월 간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미술 관련 책을 탐독했다. 대출을 받은 돈 300만원으로 작업실을 한 칸 마련했다. 아침 9시부터 밤 11시까지 일하고 퇴근해 집에 와서 새벽 4시까지 그림을 그렸다. 2시간의 수면 시간은 점점 줄어 일요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몰아서 자다 나중에는 아예 자지 않기 시작했다. “책을 보면 참 많은 사람들이 독하게 살았더라고요. 밥 먹는 시간 아끼려고 바나나 먹고, 오른손으로 하도 많이 글을 써서 왼손을 써야 할 정도로요. 그런데 저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니까 그 사람들 이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60억 인구 중에서 제일 열심히 사는 사람이 되면 제일 잘된 사람은 못 돼도 제일 많이 발전한 사람은 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세상에 진실한 것 하나는, 사람은 노력한 만큼 된다는 것 아닙니까”

지하철에서 자다가 일어나면 다리가 푹 꺾였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 엎어졌다. 더 이상 주방에서 칼과 불을 다룰 수 없어 단순한 육체 작업만 할 수 있는 물류창고로 일자리를 옮겼다. 인터넷 까페 ‘레드 마르스(Red Mars)’를 열어 작품을 올렸다. ‘어떻게 그린 건지 방법을 알려달라’는 요청에 무료로 표현 기법을 가르쳤다. 배우는 사람 중에는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뿐 아니라 미대 학생, 화실 원장, 현직 작가도 있었다. 최정규라는 이름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수강생을 받아 그림을 가르쳤다. 지난해에는 ‘키아푸’ 아트페어에서 작품 10점을 팔았다. 전도유망한 화가를 지원하는 에트로(ETRO) 한국지사의 후원도 받게 됐다.

 


‘아연’ 116.8 x 91, oil on linen, 2011

 

 

극단적 예술

신진 작가에게 등단 기회를 주는 취지로 열린 서울디지털대학 미술상 공모전에서 최정규씨가 대상을 수상하자 대학 측은 그에게 4년 전액 장학금 지급을 약속하며 입학을 권유했다. 37세의 나이에 그는 신입생이 됐다. 학교는 공부할 내용을 다 주는 시스템이라 정말 편리하다고, 그는 감탄하며 말했다.

정식 작가가 됐지만 그는 여전히 하루 10시간 넘게 그림을 그린다. 예전엔 자주 슬퍼하고 우울해했지만 그림을 그리면서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전보다 행복해졌지만 증오를 잊은 것은 아니다. “사회에 대한 원망은 평생 못 잊을 거예요. 그런 걸 빨리 잊어서 사람들이 평범해지는 것 같아요. 앞으로도 자살, 처형 같은 비극적 상황이 그림의 주류가 될 겁니다.” 그는 이었다. “역설적으로, 그 속의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어요.”

그는 ‘사람에는 세 종류가 있다’고 했다. “남이 도와줘야 먹고 살 수 있는 사람, 자기 먹을 것만 책임지는 사람, 1만 명을 먹여 살리는 사람이 있어요. 세 번째 사람의 재능은 하늘이 혼자만 잘 먹고 살라고 준 게 아니고 만인을 행복하게 하라고 준 것이죠. 저도 제가 가진 불운 속 재능으로 사람들에게 자극을 주고 싶어요. 극단적 예술 상태에 이르면 그걸 보는 많은 사람들이 비슷하게 극도의 희열을 느끼거든요. 박지성이 골을 넣으면 한국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처럼요. 그래서 지금은 다 말할 수도 없는 여러 것들에 도전해서 다 이뤄내고 싶어요. 저는 신화가 될 거예요.” 

 

‘Self portait’ 162.2 x 86, oil on linen, 2010

 

본 기사는 대학내일에서 영현대에 제공하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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