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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보는 아산 정주영과 현대건설 이야기...

작성일2012.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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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기자단

 

 

1947-정주영회장 현대 토건사 설립

 

현대건설은 1947년 현대토건사라는 이름으로 창립하여, 국가산업건설의 견인차로 지난 50년대 이후에 조국 근대화를 땀으로 일구어냈고 1960 년대 말에는 국가가 어려웠을 때 해외 건설 시장에 진출하여 우리의 우수한 기술력과 시공능력을 발휘하고 한국의 위상을 세계 곳곳에 심어주었으며, 해외에서 외화를 벌어들여 경제 회생에 기여하는 등 지난 53년간현대건설이 걸어온 길은 한국 경제발전의 역사와 그 맥을 같이 했었다.

정주영 어록 中에서..

어떤 일을 할 때는 경력이나 학벌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시점에서 그 사람의 마음가짐과 자세가 일을 한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극복하지 못할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이유 같은 것이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故정주영

 

1950-현대자동차공업사와 현대토건사 합병하여 현대건설주식회사로 상호변경

1947년... 자본과 경험도 없는 상태에서 설립된 `현대토건사`를 시작으로 1950년에는,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본격적인 사업을 펼치려 할 때 6.25전쟁이 발발하였다.

현대건설만의 위기가 아니라 한국 전체의 위기였습니다. 3년간의 전쟁으로 한반도는 폐허가 되다시피 했고 곳곳에서 복구의 손길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러나 미군 통역관인 동생의 끈으로 미군과 교류를 하며 미군으로부터 미군숙소 등 다양한 수주를 받았고 이때 생긴 경영일화가 있습니다.

 

정주영 일화 中에서...

1952년 12월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방한할 당시, 대통령의 일정중에는 부산 대연동에 있는 유엔군 묘지를 방문하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은 어지러운 묘지를 새롭게 단장하고자 하였으나, 한겨울에 파란잔디를 깔아야한다고 아산 정주영에게 요구했지만 엄동설한에 잔디를 구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때였는데... 그때 현대 건설의 정주영 사장은 미군 장교에게 찾아가 대통령이 자나가면서 보기에 풀만 파랗게 나 있으면 되는 것 아니냐 라고 묻자. 물론 그러면 된다라고 미군 장교가 이야기하자, 아산 정주영은 낙동강변의 보리밭에서 새파랗게 자란 보리밭에서 새파랗게 자란 보리들을 단5일만에 묘지를 녹색으로 만들었다는 일화가있다.

정주영 어록 中에서..

모든 생활 면에 있어서 긍정적이고 모든 목표에 있어서 낙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노력하면 반드시 뜻한 바 성공을 거두게 된다. -故정주영

 

1955-고령교 복구공사 착공

 

 

1958-한강 인도교 복구공사 준공

현대건설은 1951년 상현교 복구공사를 시작으로 월천교, 고령교, 한강 인도교 등 복구공사에 주력했으며, 전쟁의 피해가 복구되고 근대화 바람이 불자 현대건설은 기간산업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경인고속도로, 경부고속도로 등 산업발전의 기초가 되는 공사에 주력하며 한국 산업 발전의 기틀을 다져갔습니다.

전쟁의 아픔을 딛고 꿋꿋하게 일어났던 한국.

현대건설은 국민과 아픔을 나누며 묵묵히 디딤돌이 되었던 것입니다.

 

1968-국내 최초의 고속도로 경인고속도로 준공, 대통령 표창수상

 

정주영 어록 中에서..

폭넓은 인간 교류는 나에게 유머를 잃지 않게 하고, 편견에 사로 잡히지 않게 하고, 인생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고, 공감대를 확대시키고, 그들의 정서를 흡수함으로써 사람이 쉽게 빠지기 쉬운 사고의 경직을 방지해준다. 인간 교류를 통해 나는 많은 소득을 얻었으며, 그것을 기업경영의 창의적 에너지로 활용한다. 기업은 인간을 위한 인간의 단체다. 이기심을 버린 담담한 마음, 도리를 알고 가치를 아는 마음, 모든 것을 배우려는 학구적인 자세와 향상심… 이러한 마음을 갖추고 있는 집단이야말로 올바른 기업의 의지, 올바른 기업의 기업의 발전이 가능하다. -故정주영

 

정주영 일화 中에서...

소양강댐은 경부고속도로 등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의 3대 국책사업으로 꼽혔었다.

동경대 출신으로 이뤄져 세계 유수의 댐을 건설해온 "일본공영"의 설계로, 본래 처음 도안은 콘크리트중력식으로 설계되어 당시 일본측의 전문가들은 저수용량이 이렇게 큰 것은 무조건 콘크리트로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정주영 회장은 비용을 3분의 1로 낮추면서도 훨씬 튼튼한 사력식(소양강 댐 주변에 널린 모래와 자갈을 이용한 공법) 공법을 제안했습니다. 일본측으로부터 소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무식쟁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고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아산 정주영의 손을 들어주어 소양강댐이 완성되었다고한다.

그래서 소양강은 일본측의 주장한 중력식이아닌 정주영이 주장한 사력식댐으로 지어짐으로써 엄청난 비용을 감축하고 능력을 인정 받았습니다.

 

 

1973-우리나라 댐 건설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가져온 공사, 소양강 다목적댐 준공

 

 

정주영 어록 中에서..

사업의 착수에서 우선 국민과 인류에 필요한 것인지를 살피고, 그 다음 수익성·자금·인력·기술 등을 따져 자기 능력에 맞는 사업을 전개하도록 해야 한다. -故정주영

 

 

 

1980-20세기 최대의 역사로 불리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 산업항 준공

 

-그의 수많은 일화 중에서도 20세기 최대의 공사로 불리는 '주베일 산업항' 건설

1976년 사우디아라비아는 총공사비 15억 달러 이상이 드는 주베일의 산업항 건설계획을 발표했다.

그는 입찰단을 이끌고 현지에 가서 체류하며 9억 4460억 달러를 적어내 공사를 따냈다. 그 금액은 그 해 우리나라 예산의 반에 해당하는 액수였고, 낮은 금액으로 수주한 탓에 그는 공사비를 낮추는데 총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공사를 하던 중 그는 여러가지 아이디어로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공사 기간을 하루라도 줄여야 보다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으므로 모든 기자재를 울산에서 만들어 세계 최대 태풍권인 필리핀 해양, 동남아 해상, 몬순의 인도양을 거쳐 걸프만까지 대형 바지선에 실어 나르는 대양 수송작전을 발표했다.

"모든 자재는 국내에서 송출한다" 이 한마디로 세계 건설 사상 초유의 드라마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울산에서 주베일까지는 1만2천킬로미터, 경부 고속도로를 15번 왕복하는 거리였다. 게다가 자켓이라는 철제 구조물 하나가 가로 18m, 세로20m 높이 36m, 무게가 550톤으로 웬만한 10층 빌딩 규모였고, 제작비는 당시 개당 5억원에 달했다고 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 산업항에는이런 자켓이 89개가 필요했다. 현대의 간부들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반대했지만 그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주위에서는 현대가 객기를 부리다가 사우디 앞바다에 침몰할 것이라고 우려했지만, 그는 수차례 수송에 35일이 걸리고 그것도 19차례나 계속되는 이 대 모험을 보험도 들지 않고 해냈다. 전 세계가 그의 모험적 정신과 불굴의 용기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소위 '무대포'로 그 결단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해조류의 흐름을 미리 철저히 계산했고 컴퓨터 시뮬레이션 작업을 통해서 예행 연습을 실시 했었던 것이다. 실제로 주베일 산업항 공사장으로 철제 구조물을 실은 유인선을 바지선으로 끌고 이동하는 과정에서 대만 해협을 지나다가 심한 폭풍우와 높은 파도로 인해 위험에 처한 적이 있었다. 철 로프가 한차례 끊어져 철제 구조물이 유실되었으나, 그가 해류의 흐름을 사전에 치밀하게 파악하고 준비한 덕에 쉽게 유실물을 발견 할 수 있었다. 결국 그의 결단으로 인해 공사 기간 단축과 경비 절감은 조선 경기의 침체로 놀고 있는 울산 조선소에도 일감이 늘어나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정주영 어록 中에서..

모든 일은 나에게 맡겨라, 자신이 없거든 집에 가서 누워 기다려라.(사상 최대의 토목공사 주베일 항 공사 때 임직원들에게 한 말) -故정주영

 

 

1982-정주영 회장의 일생 최대의 역작, 유조선 공법을 이용해 광활한 농지로 개척(정주영 공법)

 

 

-4천300만평의 서산 간척지 공사

당시 바닷물을 막기 위해 방조재를 쌓아야할 거리는 6천400미터였으나, 하지만 마지막 270미터를 막지 못해 제자리 공사를 하고 있었다. 수천톤의 돌을 쏟아 부었지만 초속8미터의 거센 바닷물은 집채만한 돌들을 흔적도 없이 쓸어가 버렸다. 그 돌파구를 찾아낸 사람은 바로 정주영이었다. 인천항에 정박해있던 폐유조선을 끌어다, 단 한번에 물 줄기를 막자는 것이었다. 길이 322미터의 유조선이 갈아 앉자 물길은 단숨에 막혀버렸다. 서산 앞바다의 4천300만평의 땅이 탄생하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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