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역사가 살아 숨쉬는 우리 동네, 화양동

작성일2010.12.12

이미지 갯수image 8

작성자 : 기자단

 

 아스팔트 길 위를 차들이 내달리고, 층층이 쌓인 건물들이 즐비한 현재 우리가 사는 이 땅은 흙길에 말들이 달려가고 낮은 한옥들이 차지하던 곳이다. 하루가 다르게 세상은 바뀌어가고 어제까진 있었던 곳이 오늘은 원래 그랬던 것 마냥 사라져가는 세상속에 아직도 그 빛을 잃지 않고 고요하게 머물러 있는 역사들이 있다. 바로 내가, 우리가 살아가는 이 공간에 무심히 지나치는 역사들이 있는 것이다.

 

 광진구 화양동 1번지는 건국 대학교이다.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호수의 찬 바람을 맞으며 학관을 지나 직진해 올라가면 그 동안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옛 건물이 등장한다. ‘도정궁 경원당’ 이 바로 그것이다.

 

 

 도정궁은 과거 덕흥대원군의 사저(私邸)이자 선조의 잠저(潛邸, 궁궐 밖에서 태어나 살다가 왕이 된 경우 밖에서 살던 집을 이르는 말)였으며 대원군의 역대 사손들의 사저이자 종택 역할을 했던 궁이다. 덕흥대원군 이후 후손인 이하전의 저택이었으며 이하전의 죽음 이후 그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흥선대원군이 새로 지어준 집이 바로 이 경원당이다. 도정궁은 이후 화마와 도시개발 등의 모진 역사를 건너면서 많은 부분 소실되었고, 그 중 일부인 경원당이 건국대학교 내로 이전된 것이다.

 

 

 

 경원당은 학교 깊숙이 자리잡은 곳인지라 사람들의 발길도 드문 곳이다. 교내 지도를 보다가 우연히 발견하지 못했으면 졸업할 때 까지 존재조차 잘 몰랐을 정도이다. 가끔 들리는 고양이 울음소리, 건너편 초등학교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경원당을 울리고 있었다. 날렵하게 치켜올라간 처마 끝, 고운 색의 기왓장들만 언뜻 보면 전통 한옥 같다.

 

 

 

 그러나 전통 한옥과는 확연히 다른 창문이 눈길을 끈다. ‘用(용)’ 자형 유리창문과 사랑방 앞 포치(porch)를 통해 경원당이 왜 조선후기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건물 중 하나인지를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거기다 안채와 사랑채가 서로 맞붙어 기역자 형태로 집이 구성되었다. 맞붙어 보이지 않는 공간에는 부엌이 있다. 비록 들어가보진 못했지만 얼마나 편한 동선으로 생활할 수 있는지 잘 알 수 있는 구조였다. 


 비록 경원당은 작은 규모의 건물이었지만 변해가는 조선시대가 그 건물 안에 녹아 있었다.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가다 보면 호수 바로 옆 박물관이 보인다. 단순한 학내 박물관이 아닌 이 곳은 구 서북학회 회관이다. 서북학회는 문화계몽운동을 벌였던 애국단체로 안타깝게도 일진회에 맞서다 해산된 학회이다. 그렇지만 이후 서북학회 회관은 건국대, 단국대, 국민대, 고려대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와 협성실업학교 등이 이 곳을 거쳐가며 근현대 대학교육의 산실로 건재하게 된다. 그 후 낙원동에서 화양동 건국대학교 내로 복원되어 여전히 대학교육의 한 획을 긋고 있다.

 

 그리고 묘하게도 이 서북학회 회관 옆에는 청동기 시대 지석묘(고인돌)와 석관묘(돌널무덤)가 있다. 어떤 경로로 남강댐 수몰지구에서 발굴된 묘가 이 곳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근현대 대학교육의 한 획과 함께 한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구 서북학회 회관 바로 옆 길을 올라가 다시 제법 경사가 되는 계단을 타고 내려가다 보면 예술대학 앞 건널목이 보인다. 건널목을 지나 골목골목 들어가다 보면 ‘화양 초등학교’ 가 나온다. 화양 초등학교 앞 주택가 골목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우물’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이름은 ‘대동 우물’. 이미 100여년간 그 곳에서 머물러 있는 이 동네 토박이 어르신 이다.

 

 

 

 어릴 때 언제나 등하교길로 이 곳을 지날 때 마다 이상한 콩크리트 뚜껑이 덮힌 원통을 보곤 했다. ‘저게 뭐지’ 라는 생각은 했지만 공사 자재물 같은 것이려니 하고 지나치곤 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것이 우물이었던 것이다. 100년 전만 해도 필수적인 급수처였던 것이지만, 이미 이 시대 아이들에게 있어 우물이란 너무도 동떨어진 과거일 뿐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꽃단장을 마치고 이름까지 알리며 화양동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이 대동우물은 주택가 한가운데 있다. 이 우물을 중심으로 모여드는 골목만 4갈래이다. 이미 100년 전부터 이 동네는 ‘물’을 중심으로 자리를 잡아갔고, 대동우물은 그 역할을 잃어버린지 오래지만 그 영향력은 퇴색되지 않고 있었다.

 

 

 

 

 우물 옆 골목을 따라 또 다시 깊숙이 들어가다 보면 화양동사무소가 나온다. 동사무소 바로 옆에는 거대한 느티나무가 뿌리 내리고 있다. 100년간 자리를 잡아온 우물 어르신보다 7배나 나이가 많은 초고령 느티나무이다. 과거 세종대왕이 이 곳에 있었던 화양정에 들러 정자 아래 있던 말 목장을 바라보며 여가를 즐기기도 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왕족들과의 인연이 끊이질 않았는데 세조에게 쫓겨난 단종임금이 영월로 귀양갈 때 하루 밤 울며 날을 지새웠다는 곳이 바로 이 느티나무이고 명성황후가 임오군란 통에 피난길을 오르다 잠시 쉬어간 곳도 바로 이 곳이라고 한다.

 

 

 예전에 이 느티나무 앞에는 놀이터가 있었고, 바로 옆에는 빌라 단지가 있었다. 어린시절 그 곳에 살면서 자주 놀이터로 뛰어와 친구들과 놀곤 했었다. 하면 안 되는 일이었지만 가끔은 담을 넘어가 거대한 느티나무를 빙빙 돌며 놀기도 했었다.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어릴 땐 커 보였던 것도 다 자라고 나면 참 작아보인다’ 라는 말을 자주 하지만 나에게 있어 가장 큰 예외가 바로 이 느티나무이다. 어릴 때도 타고 놀 엄두도 못 냈을 만큼 거대했고, 지금의 나도 그 느티나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정도이니 말이다. 내 어린시절의 한 부분을 장식하고 있는 느티나무는 그 잠깐의 시간에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의 시간들을 켜켜이 둘러가며 언제나 그랬듯이 지금도 조용히 화양동을 내려다 보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이미 현재는 사라진지 오래 전이며 거창하게 말해 그 순간들은 역사가 되고 있다. 별 생각 없이 걷고 있는 하나의 길 위에도 이미 역사가 담겨 있고 우리는 그 역사를 단단히 다지고 있는 것일 수 있다. 100년 전에는 당연했던 우물이 현재는 과거를 관찰할 수 있는 역사가 되었고, 700년 전에 별 생각 없이 심었을 느티나무도 지금은 한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역사를 담아내고 있다. 과연 요즘의 그 어느 것이 미래의 역사로 남게될까 느티나무만큼이나 오래 살지 못해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해당 콘텐츠는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받는 저작물로 영현대 저작권이 있습니다.
                                            해당 콘텐츠의 상업적 이용을 금지하며, 비영리 이용을 위해 퍼가실 경우 내용변경과 원저작자인 영현대 워터마크 표시 삭제는 금하고 있습니다.

SNS 로그인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로그인할 계정을 선택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