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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단바에는 아직도 조선인 노동자들의 눈물이 흐른다-단바망간기념관

작성일2011.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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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기자단

 ‘배고파요’ ‘집에 가고 싶어요’ 라는 손글씨를 본 기억이 있는가 있다면 아마 그것은 검은 바탕에 삐뚤빼뚤한 하얀 글씨로 쓰여져 있던 사진일 것이다. 그 사진은 일본에 강제징용된 젊은 조선인들이 일하던 광산 벽에서 발견된 것이라는 설명은 그것을 봤다면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이러한 강제징용의 뼈아픈 과거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채 한국인들의 가슴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강제징용’ 하면 떠오르는 것은 나눔의 집에 계시는 할머님들, 전쟁통 속에서 사라져간 젊은 피들, 그리고 광산 속에서 허리 한 번 제대로 못 펴고 고통받은 인부들일 것이다. 그 중에서도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광산 노동자들의 이야기이다.

 

 

 

▶일제 강점기와 강제징용

 

 

 일본 단바 게이호쿠 초(일본의 행정단위)에는 망간 광산이 있다. 일본 3대 망간 산지로 이름을 떨치던 그 곳에 현재는 기념관이 하나 세워져 있다. ‘단바망간기념관’이 바로 그 곳이다. 이 곳은 어떤 곳이고, 어떤 역사를 안고 있는지는 우리와 그리 멀지 않은 이야기들이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이 땅에 있었던 일제 강점기 시대를 알 것이다. 이 기념관의 역사는 그 시대부터 시작한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일본과의 문호가 개방되고, 대한제국은 열강들에게 경제 침탈을 당하게 된다. 일제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세워 조선인의 토지를 약탈했고, 이러한 약탈은 대한 제국 강제 병합이 있었던 1910년 이후로는 급격하게 증가하기 시작한다. 토지조사사업이라는 이름 아래 삶의 기반을 잃게 된 수많은 조선인들은 일거리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가기 시작했다. 그 이후 일제는 ‘모집-알선-징용’ 의 형태로 조선인들을 강제징용하기에 이르렀고, 수많은 조선인들은 다시 조선땅을 밟아보지 못한 채 행방불명 되었다.

 

 

 

단바망간기념관

 

 

 이러한 뼈아픈 역사는 2대를 거쳐 일본에서 유일하게 일본의 가해 역사를 알리고 있는 ‘단바망간기념관’에 아로새겨져 있다. 고 이정호 관장의 일가도 일을 찾아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고 이정호 관장은 일본인의 차별과 궁핍한 생활 때문에 학업을 이어가지 못하고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16세의 어린 나이에 망간 광산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그 일은 그의 아들인 현 기념관 관장인 이용식 관장에게 이어졌다. 시간이 흘러 망간 수요가 줄면서 결국 이 부자가 일하던 단바 망간 광산을 마지막으로 망간 광산들은 문을 닫게 되었다. 진폐증을 앓고 있지만 보상받지 못하는 조선인들의 비참한 생활을 보면서 고 이정호 관장은 이 곳에 기념관을 만들어 ‘조선인의 역사를 남기기 위해’ 온 힘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념관을 짓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일본은 거품경제로 지원사업에 정부가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던 시기였다. 그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시작된 ‘단바망간기념관’은 예측할 수 있는 이유들로 지역 사회에서 외면당했고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결국 이 재일조선인 가족들은 사비를 모아 조금씩 기념관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낙반사고의 위험 속에서도 직접 착암기로 조금씩 기념관 시설을 만들기 위한 기반을 만들어갔다. 공사가 3년째로 들어선 1989년, 고 이정호 관장은 개관을 결심했고, 그 해 5월 3일 ‘단바망간기념관’ 은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개관 이후에도 기념관은 쉽지 않은 길을 걸어야 했다. 민간기업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지방행정으로부터 외면당해야 했고, 길 하나 내는 것조차 지역 사회의 끈질긴 반대 속에서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재일조선인 부자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념관을 꾸려 나갔다. 고 이정호 관장은 광산 노동으로부터 얻은 진폐증으로 고통받으면서도 독한 약을 투여해가며 기념관을 지켰고 죽음 바로 앞에서도 기념관 뿐이었다. 자신의 장례식에 들어갈 돈으로 기념관을 지키라는 유지를 받들어 아들 이용식 관장은 개인의 힘으로 기념관을 지켜나가기 시작했다.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으며 20년간 기념관을 꾸려왔지만 일본에 흐르는 우경화로 인해 초창기 년 2만 명에 달하는 방문객이 뜸해지며 결국 만성적인 적자에 이르고 만다. 결국 재건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단바망간기념관’은 그렇게 문을 닫아야만했다. 그러나 이용식 관장의 투쟁은 계속 되었고 결국 올해 3월 다시 ‘단바망간기념관’은 문을 열게 되었다.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


 앞서 ‘단바망간기념관’ 의 짧은 일대기를 살펴보면 쉽게 볼 수 있는 단어는 ‘차별’이다. 재일조선인에 대한 우월감과 차별이 만연한 일본 땅은 살기에 쉬운 곳은 아니었다. 학교에서도 대다수 일본 교육자들에 의해 차별을 받아야 했고 고 이정호 관장은 재일조선인의 안전을 위해 조직된 ‘보안대’ 활동을 하다 잡혀 들어가는 수모까지 당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단바망간기념관’ 이 세워지게 된 가장 큰 이유로 작용한 광산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위험한 폭파 작업에는 조선인들을 투입시켰고 안전 수칙을 알지 못한 채 위험천만한 상황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임금 지급에서 또한 차별을 받아야만 했으며 무엇보다도 광산 노동자들의 삶을 옭아맸던 ‘진폐증’ 에 대한 피해보상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이러한 진폐증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진 것도 꽤 시간이 흐른 뒤었고, 진폐증 인정 신청을 했어도 우울증을 이기지 못하고 인정 직전 자살하는 조선인도 생겨난 후였다.

 

 이러한 조선인 차별의 역사는 그 시대로 끝이 났을까 안타깝게도 차별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한 차별은 이용식 관장이 ‘단바망간기념관’을 끝까지 지키려는 이유 중 하나이다. 교육문제를 비롯해 취업, 결혼, 법적 지위 등에서 차별 받아야 하는 재일교포들의 삶은 비록 일제 강점기가 끝이 났어도 우리들이 외면한 역사의 한 부분인 것이다.

 

 

 

한국인들은 무엇을 했나

 

▲ 영화 `우리학교`. 혹가이도 조선학교 학생들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국적 문제로  대한민국이 아닌 북한으로 수학여행을 떠나는 이야기가 나온다. 사진 출처 영화 `우리학교` 공식 블로그(http://blog.naver.com/ourschool06).

 


 일본교포들의 국적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대한민국 국적, 북조선 국적, 그리고 조선국적. 일제 강점기 시대에 일본에 들어온 조선인은 그 땅이 대한민국과 북조선으로 갈릴 때 까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이미 사라진 ‘조선’ 이라는 나라의 국민으로 아직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조선 국적을 가진 재일조선인이 바로 ‘단바망간기념관’을 세운 이 부자였고 이들은 조선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지며 살아왔다.

 

 이러한 조선국적 재일조선인들은 일본에 있는 ‘재일본 대한민국민단(민단)’과 ‘재일본 조선의 총연합회(조총련)’ 이 두 단체에 따라 그 성향이 조금 다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쉽게 말해 민단과 조총련은 각자 지향하는 정권도 달랐고 목표도 달랐기 때문이 그 성질이 달랐던 것이다. 어느 단체에 속하느냐에 따라 대한민국 국적을 선택하기도 하고, 북조선 국적을 선택하기도 하고 또는 자랑스런 조선국적을 그대로 유지하기도 한다.

 

 

 이 부자는 조선국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 이용식 관장은 2000년 강제징용에 대한 과거사 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해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게 된다. 그 배경에는 ‘모국방문사업’이 있다. 재일교포들의 고향방문을 지원하는 사업으로 시작되어 점점 조총련 탈퇴와 대한민국 국적으로의 국적변경을 유도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국적이 아닌 재일교포는 대한민국을 방문할 때 까다로운 절차를 밟게 했던 것이다. 이용식 관장은 대한민국을 방문해 그 곳에서 과거사 연구를 하루 빨리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국적을 바꾸게 된 것이다. 결국 차별은 일본 뿐만이 아니라 같은 민족 사이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2009년 12월 인권위의 ‘국적전환 강요말라’는 권고가 있었다. 지난 달 2010년 12월에는 법무부에서 ‘재일조선인도 한국 국적적자’ 라는 검토 의견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검토는 결국 재일조선인에 대한 또 다른 차별로 이어질 가능성이 충분하다. 결국 재일조선인의 국적을 바꾸는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우리가 갈 길은 먼 것이다.

 

 

 

끝을 맺으며

 


 ‘단바망간기념관’은 일제 강점기의 뼈아픈 실체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아직까지도 지워지지 않는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말하고 있다. 그러한 중요한 기념관을 우리는 여태껏 알지 못했고 한 조선인 일가에게 모든 걸 맡겨오고 있었다.

 

 

 ‘단바망간기념관’은 여러차례 위기를 겪었다. 그러한 위기를 이기게 해준 것은 놀랍게도 ‘인권자료전시전국네트워크(인권네트)’ 라 불리는 일본 단체의 도움을 통해서였다. 이 단체는 일본 정부로부터의 그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하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자신들의 일과 같이 기념관의 어려움을 도왔다. ‘단바망간기념관’은 이들의 모금과 관심어린 운동 등을 통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또한 ‘제17회휴먼풍차상’ 이라는 상을 타면서 일본 내에서 많은 도움을 받아 기념관을 열 수 있었던 것이다.

 

 

 ‘단바망간기념관’은 어떤 면을 살펴 보아도 대한민국의 역사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며 지켜야 하는 곳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곳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고, 그들은 일본 민간 단체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날로 역사의식이 흐릿해져가는 대한민국은 민망해야 할 부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기념관은 폐관 소식을 시작으로 점차 한국 내에서도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재일동포와 일본시민들이 먼저 재건위원회를 발촉했고, 이어 한국 측 재건위원회도 만들어졌다. 보수작업에 필요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작년 11월 한국 밴드인 ‘윤도현 밴드’ 의 자선공연이 교토에서 열리기도 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일단 관심을 가져보자.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을 해 보는 것이다. 현재 다음 아고라에서는 ‘단바망간기념관’ 재건을 위한 모금 운동이 이루어지고 있다(http://agora.media.daum.net/petition/donation/viewid=99985). 몇 글자의 리플 달기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어떤 일이든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한다. 고 이정호 관장의 한 마디로 이 글을 끝맺고자 한다.

 

 

 ‘너는 냄비에 가득 담긴 밥을 먹을 때 한 번에 먹느냐. 숟가락으로 한 술씩 먹지 않느냐. 1억 엔도 2억 엔도 한 번에는 들어오지는 않는다. 일단 재료 살 돈이 있으면 되는 거다’

 

(출처: 재일조선인 아리랑-망간광산에 새겨진 차별과 가해의 역사. 저자 이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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