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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그림, 혁명.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

작성일2012.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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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기자단

사진=museofridakahlo.org.mx

 

"나의 평생 소원은 단 세 가지, 디에고와 함께 사는 것, 그림을 계속 그리는 것, 혁명가가 되는 것이다." 멕시코 미술의 어머니이자 가장 진취적이었던 여성, 희대의 알파걸로 추대받는 멕시코의 초현실주의 화가 프리다 칼로(Frida Kahlo). 실제로 그녀는 20세기 초중반 여성 혁명가로서 멕시코를 움직였고 죽기 직전까지 그림을 그렸지만 행복하지는 못했다.

 

 

사진=김원경

 

그녀는 멕시코 꼬요아깐의 파란 집(Caza Azul)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결혼을 하고 삶을 마감 했다. 이 집에서 촉망 받던 의학도였던 그녀는 사랑을 하면서 화가를 꿈꿨고 교통 사고 이후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좇아 고통마저 그림으로 승화시켰지만 사랑 받지 못한 채 숨을 거뒀다. 사방이 온통 파란 이 집에서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면서 파아란 꿈을 꾸었던 그녀의 삶이 차갑게 식어간 모든 순간이 느껴진다. 

 

사진=museofridakahlo.org.mx

 

6살 때 소아마비를 앓았지만 티 없이 맑게, 똑똑하고 예쁘게 자랐다. 의학을 공부하며 진보적인 여성이 되고자 했다. 그러나 18살 무렵 교통 사고 이후 침대에서 일어설 수 없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온 몸에서 자유로운 부분이라고는 오직 두 손 뿐. 화가가 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침대에서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평소 관심이 있었던 그림을 그리는 일 뿐이었다.

 

그림을 그리며 또 다른 자신을 찾은 그녀는 집중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여성편력에 기괴한 행동으로 식인귀라 불리던 디에고 리베라에게 미술 지도와 평가를 받으며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 사랑은 그녀를 더욱 그림에 몰두하게 했으며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그녀에게 그림은 마음으로부터 세상으로 나아가는 통로가 되었다. "나는 다친 것이 아니라 부서졌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는 동안만은 행복하다."는 그녀의 말에서 바닥까지 떨어져버린 프리다를 다시금 끌어올려준 그림에 대한 그녀의 애착이 느껴졌다. 

 

사진=museofridakahlo.org.mx

 

딸바보였던 그녀의 아버지는 침대 천장에 전신 거울을 달아 놓고 목 지지대와 침대에서 쓸 수 있는 이젤을 직접 제작해 그녀가 누워서도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했다. 딸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그렇게라도 그림을 그리겠다는 프리다의 의지는 침실을 들여다보는 이의 마음을 울린다. 가슴이 아리다가도 조금은 무섭다. 아버지의 눈물겨운 사랑으로 만들어진 침대에서 거울을 보며 자신을 얼굴을 그리던 것이 프리다가 평생 자화상을 그리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너무나 자주 혼자 이기에 또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이기에 나를 그린다.”

 

이렇게 그려진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은 독특하다. 자신의 모습에 몸 속 장기를 드러내기도 했고 자신이 가까이 하는 동물에 자신의 얼굴만 그려 넣기도 했으며 또 다른 자신을 그리기도 했다. 또한 못으로 자신을 자해하거나 슬픈 얼굴로 피를 흘리고 있는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녀는 그림에 자신을 담았다. 비단 얼굴 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마음까지 담았다. 가혹했던 교통 사고 이후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여성으로서,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아내로서 남편을 향한 애증을 모두 그림에 쏟아부었다.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한 절박함으로 그려온 이 그림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세계의 페미니스트들과 초현실주의 미술가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로써 그녀는 멕시코 미술의 어머니이자 가장 진취적인 여성으로 자리매김 하였다. 대단한 그녀의 그림은 극한을 표현했기 때문이랄까 그녀의 고통에 다가가기도 전에 끔찍한 기분부터 드는 것도 사실이다.

 

 

사진=museofridakahlo.org.mx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는 프리다의 운명이었다. 괴짜 예술가와 그림을 통해 사랑을 나누었고 디에고는 그녀에게 화가이자 혁명가로서 명예를 가져다 주었지만 그녀를 한없이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사랑을 주지는 않았던 것이다. 무심한 디에고는 결국 그녀의 여동생과 바람이 났고 배신감에 치를 떨던 프리다는 착한 아내 생활은 모두 접고 스스로 세상으로 나아간다. 그 시절 소련의 시대의 혁명가 트로츠키를 만나 촛불 같은 사랑에 빠진다. 스탈린으로부터 추방된 트로츠키는 프리다의 도움으로 혁명의 기운이 가득했던 멕시코로 망명할 수 있었다.

 

잠깐의 사랑은 이내 지나가 버리고 그녀에게는 디에고뿐이었다. 프리다는 그녀의 이마에 디에고가 새겨져 있는 자화상을 그리며 그림으로나마 그와 하나가 되고 싶어했다. 사랑하지만 다가갈 수 없는 사람, 훗날 프리다는 디에고를 만났던 것을 인생의 "두번째 사고"라고 말했다.

 

프리다는 사회의 관습을 따르고자 하지 않았다. 또한 그녀의 그림이 초현실주의의 걸작이라는 평을 받아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항상 그녀의 독보적이고 독자적이었다. 이로써 20세기의 진보적인 여성으로서 세상에 우뚝 설 수 있었고 디에고와 함께 사회운동을 함으로써 멕시코의 여성 혁명가로 남았다. 더불어 고독과 고통을 그림으로 승화함으로써 작품성 있는 그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프리다는 멕시코를 대표하는 여류 화가가 되었다.

 

 

사진=김원경

 

프리다는 곧 그녀가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병세가 악화되어 다리를 잘라내야 했고 계속되는 수술은 번번히 실패했다. 죽음이 가까워 올 수록 그녀는 그림 그리기에 더욱 전념했다. 그녀의 모든 것을 그림에 쏟아 부었으며 더 열심히 사회 운동을 펼쳤다. 1953년, 처음으로 그녀의 개인전을 열고 기쁨도 잠시 남편 디에고에게 한 달 빠른 결혼 기념일 선물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삶이 너무나 고단했던 탓일까. 그녀의 마지막 일기에는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하는 한 마디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렇게 그녀는 아름다울 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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