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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침략의 참혹함, 필리핀 생생한 식민통치의 현장을 가다.

작성일2012.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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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기자단

 

스페인의 흔적, 성벽안의 요새 '인트라무로스'

인트라무로스(Intramuros)는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으로, 16세기에 스페인인들에 의해 지어진 스페인 식민 지배 구역이다. 인트라무로스는 파시그 강(Pasig River) 남쪽에 위치한다.


인트라무로스 지도 (자료출처: http://philkor.info/xe/g05m05/1525)

1564년 스페인의 항해가인 미켈 로페스는 식민지인 멕시코를 출항하여, 다음해 1565 2 13일 필리핀 세부 섬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첫 스페인 식민지를 구축했다. 이후 원주민들에게 마닐라의 풍부한 자원과 대해 들은 로페스 데 레가스미는 필리핀 북쪽 지역을 탐사했다.

1570년 스페인 사람들은 루손 섬에 도착했다. 스페인 인들이 도착하기 전 마닐라는 무슬림 족장  라자 솔로만에게 통치 받고 있었다. 이슬람 주민과 스페인인들 사이에 분쟁이 생기자, 미켈 로페스는 마닐라에 영구 거주지를 설치하기 위해서 원주민들과 전쟁을 일으켰다. 1571, 원주민들과의 전투에서 미켈 로페스는 세 명의 족장 라자 쉴레, 라자 라칸두라 라자 마탄다와 평화 조약을 맺게 하고, 스페인 인들을 마닐라로 이주시켰다.

1571 6 24일 마닐라의 풍부한 자원과 입지를 이용해, 미켈 로페스는 그 지역을 필리핀의 스페인 식민지의 수도로 선언했다. 당시 필립 2세 스페인 왕은 미켈 로페스와 그의 새로운 정복지에 Ciudad Insigne y Siempre Leal(유명하고 영원히 충실되는 도시)라는 칭호를 내려 주었다.

인트라무로스는 필리핀의 초대 총독인미켈 로페스에 의해 계획되었다. 그는 요새와 도로, 교회, 학교를 지었다. 또 중국과 일본의 해적들로부터 수도를 보호하기 위해 성벽을 증축하였다. 이 성벽은 약 4.5키로에 달하며, 그 면적이 약 64헥타르에 이르렀다.

이 성벽이 바로 인트라무로스라는 어원의 시초이다. 인트라무로스를 스페인어로 직역하면 "벽 안에서"라는 의미로, 벽에 둘러싸인 도시 또는 요새를 뜻한다.


인트라무로스 산티아고 요새의 성벽

 

수 많은 전쟁과 침략 역사의 생생한 현장

인트라무로스는 적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해 만들어진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 쌓인 도시다. 이 성벽이 만들어진 이유도 각종 해적들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해서였다. 그 말은 필리핀 마닐라가 얼마나 많은 침략으로부터 시달려 왔는지를 반증한다.

 


인트라무로스 안에 전시되어 있는 실제 대포와 포탄들

네덜란드 해적들이 와서 마닐라의 자원들을 약탈해 가기도 했으며, 1762년에는 영국 해적들이 인트라무로스를 침략하기에 이르렀다. 영국인들은 스페인이 되찾기 전 까지 약 2년동안 이곳을 통치하였다.

1898년 스페인-미국 전쟁 이후, 미국인들이 필리핀 제도로 진출하게 되면서 엄청나게 많은 전쟁과 침략을 겪는다. 필리핀인들은 매번 다른 통치자들을 섬기게 되었으며, 인트라무로스의 성벽들은 점점 무너지고 황폐해져 갔다.

마지막 식민 통치 시절인 일제 통치 기간에는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기 때문에 수많은 필리핀 인들이 고통 당했다. 산티아고 요새(Fort Santiago)는 고문과 처형의 장소로 이용되었고, 수백, 수천명의 필리핀들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고문과 처형의 장소로 이용되었던 지하 감옥 

일본으로부터 필리핀제도를 되찾은 미국이 필리핀의 독립을 선언한 후로, 이곳 인트라무로스는 죽음의 도시가 되어 버렸다. 수십년간의 전쟁과 침략 때문에 성안의 도로와 건물들은 황폐해졌으며 많은 사람들이 죽고, 병들었다. 각종 트럭과 컨테이너들이 도로 위에 쌓여만 갔고, 심지어는 성 아우구스틴 성당을 허물자는 이야기도 나왔다.

이를 막기 위해 1979 4 10, 필리핀 정부는 이 인트라무로스를 주요 관광지로 지정하고, 국가적인 문화 유적지로써 복원사업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 곳에 산 루이스 플라자 관광 레져 복합단지를 건립하고 레스토랑, 호텔 등을 건설하여 관광지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계획을 세웠다.

 

이곳 산 루이스 플라자 컴플렉스는 호텔과 레스토랑, 기념품점등이 입점해 있으며, 스페인 인들의 생활상을 복원해놓은 카사 마닐라 스페인 생활상 박물관 (Casa Manila Colonial Lifestyle Museum)이 있다.


산 루이스 플라자 컴플렉스의 고급 레스토랑


카사 마닐라 스페인 생활상 박물관의 전경, 내부로 들어가면 사진촬영이 금지되어있다

 

현재는 인트라무로스는 이와같은 노력 덕분에 필리핀 마닐라에서 가장 유명한 유적지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인트라무로스는 전쟁과 식민 지배의 잔혹성을 알리는 귀중하고 가치있는 세계적인 문화 유산으로 거듭났다.

 

필리핀 독립 운동 영웅, ‘호세 리살의 영혼이 서려있는 산티아고 요새 (Fort Santiago)

 


산티아고 요새 입구

인트라무로스 유적 답사는 보통 웅장하고 고풍스러운 마닐라 대성당이나 혹은 마닐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인 성 아우구스티누 성당에서 시작한다. 마닐라 대성당이 웅장하고 화려한 풍채를 자랑하고 있다면, 성 아우구스티누 성당은 단아하면서도 우아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만일 관광용 마차를 타거나, 필리핀 친구들과 함께 방문하게 된다면 이 인트라무로스에서 가장 먼저 방문하는 곳이 바로 산티아고 요새(Fort Santiago)이다.

이곳 산티아고 요새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필리핀의 영웅 호세 리잘(Jose Rizal, 1861-1896)의 동상과 그의 박물관이다. 산티아고 요새는 사형 집행을 당하기 전에 수감되어 생활했던 호세 리잘의 유품과 당시의 모습들을 모형으로 제작하여 보존하고 있다.


호세 리살 동상

호세 리살은 필리핀 라구나주 칼람바의 부유한 지주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스페인에서 약학을 공부하고 파리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독일에서 의사 자격증을 가지게 된다. 11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언어적 천재였으며, 다작의 시인이자 ,소설가였고 , 철학, 경제학, 사회학, 무술과 펜싱, 사격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의 가슴 속에는 자신의 어머니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던 기억,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당했던 인종차별에 대한 분노가 쌓여져만 갔다. 그리고 필리핀 땅에서 필리핀인들의 토지를 거침없이 강탈하는 스페인 인들의 횡포에 대한 분노를 그의 소설 <나를 건드리지 마라>에서 그의 분노를 풀어내었다. 이로 인해 리살은 필리핀 스페인 식민 당국의 눈밖에 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리살 박물관에는 그가 직접 쓴 책 내용을  목판에 조각해 전시해 놓았다


이후 스페인 당국은 귀국한 리잘을 가만 놔 두지 않았다. 리잘이 그 친구들과 <라 리가 필리피나>라는 사회단체를 결성하고 이 단체를 통한 필리핀 인들의 단결을 천명한 뒤 그는 바로 체포되어 다피탄이라는 시골로 유배된다. 하지만 시골에서도 그는 지역사회의 교육과 의료를 위해 봉사 하였다.

하지만 그는 혁명가가 아니었다. 그는 의사였고 시인이었다. 무장 투쟁에 가담한 적도 없었으며 오히려 자유로운 삶을 즐겼다. 하지만 그는 필리핀 민중을 사랑했고 스페인 당국의 수탈에 허덕이는 필리핀 인민들을 부둥켜 일으켰다. 식민 당국으로썬 이 같은 사실이 못마땅해 리살을 처형할 구실을 찾고 있었다.

결국 1896년 호세 리잘의 유배 소식에 분노했던 필리핀 청년 중의 하나인 안드레스 보니파쇼가 주도한 민중 봉기가 일어난다. 스페인 당국은 이 봉기의 배후로 리잘을 지목했고 리살은 결백을 주장했으나 재판 끝에 산티아고 요새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끝내 1896 12 30일 총살대 앞에 서게 된다. 필리핀 정부 당국은 리살이 감옥에서부터 걸어가던 그 길에 리살이 직접 걸었던 발걸음을 재현한 발자국들을 새겨놓았다.

 


처형장까지 호세 리살이 걸었던 길목에 발자국을 새겨놓았다

 

리살의 생애에 대해 보다 정확하게 알고 싶다면 산티아고 요새안의 리살 박물관에 방문하면 된다. 스페인의 식민 통치 지배에 맞서 책을 펴내고 시를 짓던 리살의 행보를 산티아고 요새의 리살 박물관에서 느낄 수 있다.

리살 박물관의 나가는 길목 끝자락엔 리살이 처형되기 전 썼던 시가 새겨져 있다. 처형되기 전날 오후 3시반경 그는 감방에서 Mi Ultimo adios(내 마지막 안녕, 내 마지막 작별, 마지막 인사)를 썼다. 그것을 취사용 알콜 난로 (cocinilla)속에 숨겼다가 누이 트리니다드에게 건네주었다고 한다.

이 시는 동판으로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따갈로그어, 영어, 스페인어로 쓰여져 있다. 이 시를 읽는 사람은 조국의 애처로운 상황을 안타까워하고 있으면서도 그런 조국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한 열사의 모습을 그릴 수 있다. 우리나라의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마지막 인사

(중랶)

어두운 밤 지나고

동녘에서 붉은 해 떠오를 때

그 여명 속에 나는 이 생명 마치리라

그 새벽 희미한 어둠 속

작은 불빛이라도 있어야 한다면

나의 피를 흩뿌려

어둔 새벽 더욱 밝히리라

 

이제 나는 너를 떠나야 하는구나

모든 즐거움과 절실한 열망을 버리고

아 너를 위해 가슴 속에서 우러나

만세 만세를 부르노라

우리에게 돌아올 최후의 승리를 위해

나의 죽음은 값지리니

네게 생명을 이어주기 위해

조국의 하늘 아래 숨거두어

신비로운 대지에 영원히 잠들리니

아 행복하여라

 

먼 훗날 잡초 무성한 내 무덤 위에

애처로운 꽃 한 송이 피었거든

내 영혼에 입맞추듯 입맞추어다오

그러면 차가운 무덤 속

나의 눈썹 사이에

너의 따스한 입술과 부드러운 숨소리 느끼게 되리니

부드러운 달빛과 따스한 햇빛으로

나를 비쳐다오

내 무덤가에 시원한 솔바람 불게 하고

따스하게 밝아오는 새 빛을 보내다오


(중략)

 

 

필리핀의 인트라무로스. 전쟁과 침략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이곳에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필리핀 인들은 그들의 나약함으로 수 백년간 식민 지배를 받았다는 것에 대해 통감해 하고 있을까 자신 선조들의 향수를 찾기 위해 방문한 스페인 인들은 이곳에서 선조들의 잔혹함을 마음 속 깊이 반성하고 있을까 그리고 우리 한국인들은 이곳에서 식민 지배의 아픔을 함께 공유하고 있을까


호세 리잘의 일대기를 그린 그림, 이 그림을 보면서 각 국가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나치의 잔혹성을 세계에 알린 안네 프랑크의 일기 한권처럼, 식민 지배의 분노를 세계에 알린 호사 리살의 저서와 시편은 '펜은 총칼보다 강하다'라는 명언을 연상시킨다.  비폭력 저항의 정신이 서려있는 리살의 정신덕분에 전쟁과 침략의 역사로 점철된 인트라무로스가 조금은 밝게 빛나고 있다.

인트라무로스는 아픔과 한이 서려있는 유적지이다. 이 유적지 하나가 우리 마음속에 많은 의미를 던져주는 이유는 그 처절한 전쟁의 역사 속에서 전쟁의 참혹함을 한번 더 상기 시켜주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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