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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뒤흔든 여자, Eva Peron을 떠올리다.

작성일2012.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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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기자단

(아르헨티나 서점에 진열된 에바 페론 엽서. 사진=이우영)

 

  2012년의 대한민국은 다가오는 4월 총선, 그리고 12월의 대통령 선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분주하다. 다양한 매체에서 총선에 관한 뉴스 뿐만 아니라, 대통령 선거에 관한 뉴스까지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리고, 대학생이 된 우리도 어른들만의 세계였던 선거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되었다.

 

  한동안 한국 사회에서는 '정치는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고정관념이 만연하곤 했다. 하지만, 최근 대한민국에서 여성 정치인들의 역할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그것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몇몇 정당에서 여성 정치인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최근의 변화라 할지라도, 사실 세계로 눈을 돌려보면 수많은 현대사들이 여성 정치인들에 의해 쓰여졌다.

 

[아르헨티나의 대통령궁 카사 로사다(Casa Rosada). 사진=이우영]

 

  영국의 첫 번째 여성 수상인 마가렛 대처(Margaret Thatcher), 칠레의 최초 여성 대통령 미첼 바첼렛(Michlle Bachelet) 등 현대의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간 많은 여성 지도자들이 있지만, 아르헨티나의 에바 페론(Eva Peron)을 빼놓을 수는 없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지 60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그녀는 아르헨티나의 상징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에바 페론은 한 편의 영화와 같은 삶을 살았다. 시골의 가난한 마을에서 태어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아버지는 가족을 떠나버렸다. 예민하고 꿈이 많던 그녀는, 15살이 되던 해에 야망을 품고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향한다. 하지만, 기회의 땅인 줄 알았던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가난한 시골뜨기에게 만만치 않은 곳이었다. 그녀는 힘있는 남자들의 하룻밤 상대가 되어주는 것도 서슴치 않으며 자신의 아름다운 외모를 이용했고, 결국 최고의 여배우 위치까지 오르게 된다.

 

  한 자선 행사에서 이뤄진 후안 도밍고 페론(Juan Domingo Peron)과의 만남은 그녀의 인생을 다시 한 번 바꾸어 놓았다. 그들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후안 페론은 파격적인 정책으로 부통령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물론, 당대 최고의 여배우였던 에바의 전폭적인 지지로 인한 대중적인 인기도 무시할 수 없었다. 게다가, 후안 페론이 사형의 위기에 처했을 때도 그녀는 대중들을 이끌어 그의 석방을 이끌어 냈다. 결국, 후안 도밍고 페론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그녀는 아르헨티나의 영부인이 되었다.

 

  그렇게, 에바 페론은 영부인의 자격으로 대통령궁(Casa Rosada)의 발코니에서 수많은 국민을 향한 연설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녀의 종착점이 아닌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다. 단순한 영부인을 넘어서, 마치 또 한 명의 대통령과 같은 존재로 아르헨티나의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 나가는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에비타 박물관(Museo Evita)에 남아있는 에바 페론의 흔적. 사진=이우영]

 

  부에노스 아이레스에는 에비타 박물관(Museo Evita)이라는 그녀만의 공간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이 곳은 그녀가 사용하던 물건과 수많은 사진들, 그리고 역사적인 영상들이 펼쳐져 있는 곳이다. 어린 시절부터 여배우 시절까지의 흔적도 흥미롭지만, 그녀의 영부인으로서의 삶 역시 이 곳에서 생생하게 느낄 수가 있다.

 

  우선 눈에 띄는 점은, 그녀의 의상과 모자 등이 대량으로 전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최고의 여배우가 될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자랑했기에, 세련된 패션을 자랑하던 에바 페론은 국내외적으로 아르헨티나의 상징이 될 수 있었다.

 

  유럽 순방이 '아름다운 영부인'으로서의 힘을 세계적으로 알린 대표적인 예이다. 원래는 대통령이 순방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에바를 믿은 후안 페론은 그녀를 혼자 유럽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 믿음에 힘입어 그녀는 중요 외교 사안을 확실히 전달했고, 게다가 각국의 빈민촌이나 고아원을 방문하기도 했다. 결국, 에바 페론은 순방 국가들의 확실한 지지를 이끌어 내는데 성공했다.

 

(Eva Peron의 수많은 드레스들. 사진=이우영)

 

  '아름다움'만 있었다면, 지금까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녀는 남편의 지지에 힘입어 민중의 입장에서 파격적인 정책을 쏟아내었는데, 이것이 그녀를 아직까지 기억하게 만드는 중요한 이유들이다.

 

  그녀는 부의 분배를 위한 국민연금과 의료보험을 도입했고, 민중들을 위한 각종 기반 시설들을 세워나가기 시작했다. 강력한 설득으로 부자들의 기부를 이끌어내 직접 재단을 설립한 뒤, 아르헨티나 빈민들 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의 빈민들에게 혜택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그러한 모습을 담은 영상들이 아직까지도 박물관 곳곳에서 상영되고 있다.

 

  그리고, 에바는 자신이 겪었던 유년시절의 아픔을 다음 세대의 많은 여성들에게 물려주지 않았다. 그동안 수많은 불평등 속에 살아온 아르헨티나 여성들을 위해, 참정권을 부여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남성과 동일한 임금과 근무조건을 보장하게 해 주었고, '여성 국회의원'을 아르헨티나 최초로 탄생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전세계에서 그녀의 흔적을 찾아온 사람들로 가득한 에바 페론의 무덤. 사진=이우영)

 

  그렇게 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려가던 에바 페론은, 불행하게도 33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작은 그녀의 무덤 앞으로 아르헨티나인들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그녀를 추모하는 꽃들이 무덤 앞에 늘 놓여 있고, 이 곳 뿐만 아니라 부에노스 아이레스 곳곳에서 그녀의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그녀가 '아르헨티나 최악의 지도자'였다고 아르헨티나인들의 의견도 상당수다. 사실 그녀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화두가 되고 있는 포퓰리즘(Populism)의 상징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의 의도는 역사가 심판하겠지만, 그녀의 정책들로 인해 아르헨티나 경제는 끝도 없이 몰락했다. 그리고 그 때 이후로, 부유함을 자랑하던 아르헨티나의 모습은 아직까지 옛 영광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수많은 그녀의 정책들은 대중의 인기에 영합해 페론의 정권 유지를 위했을 뿐이라는 비판도 적지 않다. 실제로, 그녀는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처단하면서까지 후안 페론과 자신이 만들어가는 아르헨티나를 원했다. 독재를 향한 발걸음을 옮긴 것이다.

 

  그렇지만, 영화 'Evita'와 관련된 일화는 절대 그녀를 부정적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다. 그녀를 주제로 한 'Evita'가 제작될 당시, 마돈나(Madonna)가 그녀의 역할로 캐스팅되었다. 그러자 가벼운 이미지의 마돈나가 에바의 배역을 맡게 되면 그녀를 모욕하는 일이라며, 수많은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거센 비난과 항의를 서슴치 않았던 것이다.

 

  그녀가 훌륭한 지도자였는지 최악의 지도자였는지는 아직까지도 많은 논란이 되고 있다. 신데렐라 이야기 같은 그녀의 영화 같은 삶 역시 그녀를 주목하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많은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그녀를 떠올리고 추억한다. 게다가, 그러한 부정적 사실을 알고 있는 많은 아르헨티나 국민들조차 그녀를 그리워 하기도 한다. 어찌되었던 그녀는 아르헨티나의 잊을 수 없는 상징인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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