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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올레'에서 6월의 참모습을 만나다.

작성일2012.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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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기자단

 

6 6일 현충일부터 6.10 민주항쟁, 6.25전쟁까지,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일상 속에선 그 감사함을 생각하기 힘들지만 이번 달 만큼은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을 추모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이들을 추모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오늘은 민주올레라는 길을 직접 걸으며 역사의 그 순간을 기억해보고자 한다. ‘민주올레는 민주주의 청사(靑史)에 기록된 그날, 그 장소를 걸으며 성찰하고 오늘을 있도록 만들어준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구성된 길이다.

 

 2010년 민주올레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 지금에 이르렀는데 민주올레는 사건별, 지역별로 분류되며 다양한 코스를 가지고 있다.

 

 

 오늘 걸었던 길은 이한열의 길이다. 올해로 25주년을 맞은 6.10민주항쟁을 기념하며 이한열 열사의 흔적을 따라가보았는데 이 길 가운데서 진심으로 오늘을 있게 해준 많은 이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순간순간 가슴 찡하게 안타깝기도 했고 내가 만약 저 상황이면 어땠을까하는 생각도 수 차례 들었다.

 

 민주 로드(http://www.minjuroad.or.kr/)에서 지정된 길을 따라 나서기 전에 가장 먼저 신촌역 인근에 위치한 이한열 기념관을 찾아 그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떻게 6.10항쟁에 영향을 주었는지 보았다.

 

 

 

[이한열 기념관 가는 길] 지하철 2호선 신촌역 8번 출구에서 직진하다 신촌 한의원이 보이면 좌회전하여 들어간다. 80m 정도 들어가 백석골이라는 식당을 끼고 우회전하여 70m정도 직진하면 왼쪽에 보이는 하얀 4층 건물이 이한열기념관이다. 관람시간은 월, 금요일은 오전 10:30~오후4:00, , , 목요일은 오전 9:30~ 오후3:00까지 관람가능하고 예약을 하면 주말, 저녁에도 관람이 가능하다. (문의는 02-325-7216)

 

 이한열 열사는 1987 6 9, 광주학살로 정권을 잡은 이들의 권력연장을 막기 위한 ‘6.10대회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 참여하였는데 이 때 경찰이 쏜 직격최루탄에 맞아 한 달 가까이 사경을 헤매다 7 5, 세상과 이별한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학생이다. 당시 이한열 열사가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같은 대학 학생에 의해 부축 당한 채 피를 흘리는 모습을 당시 로이터 사진기자였던 정태원 씨가 촬영하여 각종 신문의 1면 머릿 기사를 장식했다. 이 사진은 당시 전두환 독재정권의 무력진압의 잔혹함을 드러내 국민들의 분노를 일으키고 6월 항쟁을 최고조로 이끌었다.

 

 

기념관을 들어가기 전 그의 가족, 그리고 민주화 인사들이 그에게 남긴 글들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어머니의 한 마디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턱 막히도록 그리운 마음이 느껴져 슬펐다.

 

 

이한열 기념관은 3,4층인데 아담하고 조용한 실내에 그의 사진과 유품 등이 전시되어있다. 인터넷 상에서는 볼 수 없는 비공개 사진들이 전시되어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기념관은 단지 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를 추모하고 기억하는 사람들의 참여로 이루어져 있었다.

 

3층 전시관에는 6월 9일, 그 날의 모습을 생생하게 찍은 사진들을 볼 수 있다. 그의 가족들이 보기엔 가슴 아픈 장면이지만 이 장면들은 많은 사람들을 거리로 나가게 만들었다.

 

▶왼쪽부터 6월9일 당시 모습

 

 

4층에서는 그가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을 당시 입고 있었던 옷도 전시되어 그날의 잔혹성을 더욱 더 느낄 수 있었다. 그를 기리는 사업이 많이 진행 중에 있는데 그의 희생에 오늘이 있음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일에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였으면 좋겠다.

 

 

 

 이렇게 이한열 열사의 흔적을 보고 그 사진 속 현장을 따라 나선 곳은 그가 다니던 연세대학교이다. 이제부터 민주올레, '이한열의 길'을 걸어보자.

 

 올레길을 걷기에 앞서 지점 간 이동은 올레, 즉 걷는 것이 원칙이나 한가지 일러두자면 연세대학교에서 독립문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가는 길에 터널을 통과해야한다. 다소 위험하다고 판단되어 버스를 이용할 것을 권장한다. 그 외에는 걷기에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곳은 없으나 지점 마다 관람할 것이 비교적 많기 때문에 시간적은 측면에서 부담이 된다면 버스를 타고 이동해도 좋다. 민주올레의 '본질'을 잊지만 않으면 된다. 

 

 

 

 

 

 이한열 추모관에서 약 10분 가까이 걸어가면 그 유명한 사진 속 장면이자 그의 추모비가 있는 연세대학교가 보인다. 2012 6월 연세대학교는, 1987 6월의 최루탄 냄새도 머리에 띠를 두르고 항쟁하던 학생들도 보이지 않는 평온한 캠퍼스의 모습만을 보여주었다.

 

 1987년 6월의 연세대학교.

 

 정문에서 계속 직진으로 들어가다 보면 좌측에는 중앙도서관 그리고 맞은편 우측에는 이한열 동산이 있다.

 이한열 동산에서는 이한열 열사 뿐만 아니라 노수석 열사의 기념비도 만나볼 수 있다.

 

 

 

 

  

 6월의 녹음이 드리운 동산 가운데 세워진 기념비는 그 날의 긴박함과 달리 평온하게 서있다. 앞면은 그의 얼굴과 항쟁의 모습이 담긴 조각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그의 유서가 적혀있다.

 

 “…그대 끌려간 그 자리 위에 민중의 웃음을 드리우자.” 로 끝난 유서는 오늘 우리가 웃을 수 있는 이유가 자유를 위해 투쟁한 그의 희생 덕분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그는 가고 없지만 그를 추모하는 이 곳에서 괜히 오늘 내가 느끼는 자유로움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다시 한 번 느꼈다.

 

 

 

 

 

 이한열 열사의 기념비 옆에는 노수석 열사의 기념비도 있다.

 

▲고 노수석 열사 영결식.(사진제공=이한열기념사업단)

 

 노수석 열사 또한 연세대학교 학생으로 1996년 대선자금 공개 및 국가 교육 재정 5% 확보' 요구 집회에서 정권의 강경진압으로 사망한 민주화운동 유공자이다.

  

 

 

 그의 기념비는 여타 기념비와 달리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기념비에 새겨진 형상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띄고 있다. 기념비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주기가 되던 해에 그를 기리는 동문과 지인들에 의해 세워져 지금까지 많은 이들에게 그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곳으로 자리해 있다.

 

 '역사는 강이 되어 흐르고 너는 먼저 강이 되었으니' 라는 문구가 강처럼 흘러가는 역사 속에서 하나의 강이 되어버린 그를 잘 표현해주었다. 

 

 

이한열, 노수석 열사의 기념비를 보고 조금 더 학교 안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언더우드관이 보인다. 언더우드관 좌측에는 식민지시절 어느 독립투사 못지 않게 치열했던 정신을 시 속에 녹여낸 시인 윤동주의 시비를 만나볼 수 있다.

 

 

 

 

 

▲윤동주 시비

 

연희전문대학(구 연세대)을 졸업한 그는 시 속에서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과 일제에 저항하는 정신을 시로 써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로 시작하는 그의 시 속에 녹아있는 그의 고고함과 순수함은 남아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지만 일제에 의해 너무나 일찍 생을 마감하여 많은 이들에게 안타까움을 준다.

 

▲윤동주 시비로 가는 입구와 윤동주 시비 뒷면

 

윤동주 시비를 보고 나니 그 당시 일제 시대를 살면서 마음껏 글을 쓰지도, 행복하지도, 불안한 하루하루를 살았을 사람들을 진심으로 추모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연세대학교 동문 쪽으로 나와 버스를 타고 2정거장만 가면 독립문이 보인다. 이곳에서 하차하면 독립문, 서대문 역사공원,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을 만날 수 있다.

 

 

 

 

 

 

[서대문 형무소 가는 길]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5번출구

-버스: 간선버스(471, 701, 702, 703, 704, 720, 752)

         지선버스(7019, 7021, 7023, 7025, 7712, 7737, 11)

         광역버스(9701, 9703, 9705, 9709, 9711, 9712)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은 중학생 때 수학여행으로 와봤던 곳인데 그 때와 지금은 마음가짐도, 이 장소를 밟는 기분도 너무나 다르다. 아는 만큼 보였고 깊이 생각할수록 마음이 저릿했다. 너무 화창한 날씨여서 묘하게 슬펐던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성인 관람료 1,500원을 지불하면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체험이 가능하다. 이 곳에선 역시 수학여행의 메카답게 중고등학생들이 많이 보였고 의외로 외국인들도 많이 볼 수 있었다. 외국인들은 이 곳에 와서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느낌을 받을까

 

민족저항실Ⅱ

 

  이 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그리워하고 무너지려는 자신을 잡으려 애썼을까. 한이 서려서일까 나이에 비해 키가 많이 자라지 못한 통곡의 미루나무와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려오는 사형장, 그리고 좁디 좁은 수감실을 둘러보며 내내 마음이 아팠고 내가 그 당시에 이 곳에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에 무섭고 두렵기도 했다. 그러나 서대문 형무소의 곳곳을 둘러보며 진심으로 코 끝이 찡했던 장소는 바로 민족저항실Ⅱ이다. 이 곳을 들어서면 우선 '휑한 방에서 뭘 보라는 거지'라는 생각을 할 수 있으나 벽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독립운동가 수형기록표가 사방에 전시된 것을 볼 수 있다. 사진 속 사람들을 하나 하나 보면 실제 독립운동을 하다 이 곳에서 생을 마감한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동네 오빠나 언니, 그리고 아저씨, 할아버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독립 투사는 특별한 사람들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던 터라 이 곳에서 본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에 충격을 받기도 했다. 

 사진을 한장 한장 보는 동안 그들이 염원했던 자유로운 대한민국에 살 수 있어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숙연해진 마음으로 다음 장소인 독립문을 찾았다.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에서 도보로 5-10분 정도 소요된다.

 

 

 

  

▲독립문

 

 멀리서 보면 동양적인 느낌이 없지만 가까이서 보면 다소 앙증맞은 글씨로 오른쪽에서부터 '독립문'이라 쓰여져 있는 이것은 갑오개혁 이후 자주독립의 의지를 다짐하기 위해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을 헐고 세운 기념물이다. 1896년,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협회의 주도하에 국왕의 동의를 얻고 뜻있는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어 1898년 완공되었다.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 만들었다고 하는데 혹자는 자주성이 없어 안타깝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 모습이 어떠면 어떠랴, 이 곳에서 대한 독립을 외치던 이들을 기릴 수 있다면 충분하다.

 

독립문을 지나면 독립문과 이어진 서대문 독립공원이 나타난다.

 

 

 서대문 독립공원 일대는 1908년 경성감옥으로 문을 연 이후 애국인사와 항일투사들이 체포, 투옥되어 가장 많은 곤욕을 치른 곳이라고 한다. 1912년 서대문감옥으로, 1923년에는 서대문 형무소로, 1967년 7월에는 서울 구치소로 여러번 개칭되었다가 1992년 광복절 제47주년에 서대문독립공원으로 개원되었는데 가늠할 수 없는 고통으로 점철 되었을 이 곳은 현재 넓고 쾌적하게 정비되어 너무나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옥고를 치른 장소라는 배경 이외에도 이들이 시민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독립문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 이웃하여 그 역사적 의미가 더욱 깊은 곳이다. 평소에도 가족, 친구들과 함께 찾아 역사 공부도 하고 좋은 시간을 가지기에 좋으니 꼭 한 번 찾길 바란다.

 

 서둘러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로 자주적인 통일국가를 이루고자 했던 김구 선생을 만나고자 '경교장'으로 향했다.

 

 

 

 

 

 

 [경교장 가는 길] 독립문에서 도보로 20분정도 소요. 서대문경찰서교통정보센터 방면으로 걸어가다가 한복천하 앞에서 왼쪽으로 가면 대한공인중개사 사무소가 보이는데 이 곳에서 오른쪽으로 가다보면 경교장이 나타남.

*강북삼성병원 건물과 붙어 있어서 큰 건물인 강북삼성병원을 향해 가면 찾기 쉽다.

 

-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4번 출입구에서 도보로 5분.

                2호선 시청역 2번 출입구에서 도보로 10분.

 - 버스: 서울역사박물관(경교장) (271, 270, 370, 161, 160, 470, 471)

 

 

▲원형복원공사 중인 경교장

 

민주올레코스 중 하나인 경교장은 현재 복원공사 중이어서 내부를 볼 수는 없다. 다만 그 외관 만으로도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압도감이 전해져 이 곳에서 있었던 역사적 순간을 느낄 수 있었다.

 

경교장은 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낸 독립운동가인 백범 김구가 중국에서 돌아와 머물렀던 집이다. 경교장과 관련해서는 모스크바3상회의의 결과에 따른 한반도 신탁통치 반대 성명 발표,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 이후 남북 분단 위기에서 평양으로 회담을 떠나기 전에 베란다에 서서 민족의 하나됨을 강조했던 연설 등이 역사에 기억되지만, 어떤 사건들보다 더욱 오래 이야기되는 것은 바로 안두희에 의하여 김구가 암살된 현장으로서의 경교장이다. 건물 내부로 들어서면 백범이 머물렀던 작은 방을 볼 수 있는데 안두희가 김구에게 총을 겨눈 자리가 바닥에 표시되어 있으며, 총알에 맞아 깨진 유리가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복원 공사가 끝나면 다시 한 번 방문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경교장에서 나와 정동길을 따라 걷다 보면 너무나도 아름다운 돌담길 속에서 더위도 잊게 된다. 가로수 길을 따라 걸으면 그 때의 수고와 희생으로 이 시대를 편하게 살 수 있게 해준 많은 사람들에게도 감사한 마음이 든다. 이 길을 따라 가보면 6.10민주항쟁 출발지인 성공회 대성당이 있다. 규모가 크진 않지만 한국전통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을 조화시킨 성당으로 6.10민주항쟁의 역사적 장소일 뿐만 아니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곳으로 그 외부와 내부를 막론하고 너무나 평온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곳이다. 

 

 

 

 

 

 

 

 덕수궁 길을 따라 조금 헤매다가 힘들게 도착한 성공회 대성당. 이 곳은 '성당'이라 그런지 엄숙하고 조용한 분위기여서 쉽게 들어가기 힘들었다. 성당 주변을 둘러보다 우연히 6.10민주항쟁 당시 현장에 계셨던 신부님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당시 군부독재의 압력으로 집회도 쉽게 할 수 없었는데 성공회 신부들이 이 곳에서 국민운동본부 발족식을 가능하게 해주었다고 한다. 현재는 종교가 커지면서 보신주의로 관심이 기울어진 경향이 있지만 조선시대 호국불교와 같이 국가가 어려울 때 종교가 사회적 책임을 다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해주었다. 

 

한국 전통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을 조화시킨 이 성공회 대성당은 1978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35호로 지정될 만큼 건축물 자체에서도 동서양을 아우른 고풍스러움을 느낄 수 있다.

 

 

▲6월 민주항쟁 출발지였던 성공회 대성당을 기념하는 기념비

 

주교관 앞에는 6.10민주화 기념비가 있다. 기념비는 6월민주항쟁 10년을 기려 이 곳에서 제작한 것이다. 성공회 대성당에서는 6월 10일, 자체적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다고 한다. 군부독재도 감히 침범할 수 없는 구역에서 시작된 6.10민주항쟁.

 오늘을 있게 해준 많은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한 마음이 든다.

 

 성공회 대성당에서 나오자 마자 큰 길 쪽으로 나가면 탁 트인 서울시청 광장 일대를 볼 수 있다.

 

 

 

 

 

 

 

 현재도 주요 행사나 집회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서울 시청 광장. 1980년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1987년 6월, 서울시청 일대에서 고 이한열 열사의 영결식 현장.(사진제공=이한열기념사업단)

 

 그 당시부터 지금까지 국민들이 이 곳에서 얼마나 많이 웃고 울었을까. 한국의 역사 속에 가장 다사다난할 이 곳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바쁘고 정신없다. 

 

 민주 올레를 걸으면서 잊고 있던 사람들을 만나 지금의 평온한 삶에 더욱 더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살아온 자유와 민주주의가 이렇게 어렵고 아프게 이루어진 것인지 몰랐다. 6월 한 달, 민주 올레길을 걸으며 1980년을 온 몸으로 겪은 세대에게는 그 날을 다시 기억해보는 기회를, 나와 같은 대학생들에게는 잊고 살았던 그 날의 희생에 대해 감사함을, 역사를 배우고 있는 학생들에게는 역사책 속에서만 본 그 날을 직접 경험하는 기회를 갖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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