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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로커, 빅토르 최!

작성일2012.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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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기자단

빅토르 최 '키노 그리고 검은앨범'의 앨범 사진,사진 출처= Mnet

 

 지난 6월 21일으로 빅토르 최는 탄생 50주년을 맞이했다. 그가 활동했던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거리와 지하철, 버스에는 그의 50주년을 기념하는 포스터와 콘서트 포스터 등이 붙었고 사람들은 또한번 빅토르 최의 전설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그저 고려인이라는 이유로 러시아 가수 활동을 한 빅토르 최에 대해 관심이 있었을 뿐이었는데 러시아에 오니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유명한 가수였다. 그의 가사는 진실함이 묻어나왔고 러시아어 특유의 함축성이 뛰어난 가수였다. 그의 생일이면 그의 팬들은 빅토르 최의 무덤에 모여 그를 위로하고 모스크바에 위치한 ‘통곡의 벽’에는 누가 그를 추모하는 벽을 허물어버릴까 항시 벽을 지키는 학생들도 있다. 빅토르 최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빅토르 최, 그는 누구인가

 

“오늘 나는 자유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다.” - 빅토르 최

 

1986년 빅토르 초이, 이고르 무한 사진촬영 ,출처= 위키백과

 

빅토르 최는 자유를 위해 노래로 싸운 저항정신의 상징이며 록의 전설이다. 그는 1962년 카자흐스탄공화국의 크질오르다에서 태어난 고려인 3세로 5살에 레닌그라드 (지금의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이사를 오게 된다. 유년기부터 스스로 작곡을 하고 가사를 적는 음악적 성향을 보였던 그는 현재 러시아, 구소련 영토까지 모르는 사람은 간첩이라고 불릴 정도로 유명한 가수이다. 자유가 허락되지 않고 노래와 방송 모두가 검열 받던 시절 그의 노래는 민중들의 자유를 대신 주장해주었고 거리로 나와 자유를 표현할 용기를 주고 도전정신을 준, 노래하는 혁명가의 역할을 하였다. 그의 콘서트 장은 팬들에 의해 자유를 갈망하는 시위 현장이 되었고 당시 러시아 사회를 바꾸려하던 고르바초프와도 만났을 정도로 영향력이 컸으며 페레스트로이카에 힘을 실어 달라는 부탁을 받을 정도로 러시아에 익숙하지 않았던 ‘변화’라는 단어를 가져오게 했다.

 

활활 타오르는 도시에 그늘이 내린다.

우리의 가슴은 변화를 요구한다.

우리의 눈은 변화를 요구한다.

우리의 웃음에,

우리의 눈물에,

그리고 우리의 맥박에, 변화!

우리는 변화를 기다린다.

- 빅토르 최의 노래, <변화>에서

 

빅토르 최 어떻게 전설이 되었나

 

“빅토르 초이는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에게 다른 어떤 정치인들보다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는 한번도 거짓말하거나 자신을 팔아먹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빅토르 초이였고, 그렇게 기억될 것이다. 그를 믿지 않을 수 없다. 대중에게 보여지는 모습과 실제 삶의 모습이 다름없는 유일한 락커가 빅토르 초이이다. 그는 그가 노래 부른 대로 살았다. 그는 록의 마지막 영웅이다.” - 소련시대 잡지<콤소몰스까야 프라우다> 8월 17일

 

사진 출처= http://kurutoi.tistory.com

 

 어릴 적부터 미술과 예술적 재능을 타고났던 빅토르 최는 세로브 예술학교에 입학하여 <제6병동>이라는 그룹을 만들어 활동하지만 학교에서 성적이 낮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그가 학교에서 반정부적인 노래를 작곡하고 그 당시 반항아적 이미지로 비춰지던 록을 한다는 이유로 퇴학당했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는 퇴학 후에 제61기술 전문학교에 입학하여 굴하지 않고 음악 작업을 계속했고 파티에서 자신의 노래를 불렀는데 그때 역사적 만남이 이루어졌다. ‘아쿠바리움’이라는 러시아 유명 그룹의 멤버였던 보리스 그레벤시코프를 만나게 되며 그의 도움으로 ‘키노’(영화,극장의 의미)라는 자신의 그룹을 만들게 된다.

 

  라는 첫 앨범에서 그는 자신의 노래에 사회에 대한 생각을 넣기 시작했다. 가사들은 당시의 소련에서의 삶을 은유한 것이었고 많은 노래들은 공연이 금지된다. 반정부 운동을 하던 젊은이들 사이에 키노가 유명해지기 시작하며 키노와 빅토르 최는 그들의 우상으로 떠오른다. 키노는 초기에 반전음악인 <내 집을 비핵화지대로 선포한다>로 록 대회에서 1등을 수상했고 후에 <나는 선언한다>라는 노래로 러시아 국제 평화재단의 반전 가수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그는 초기 매니저였던 마리안나와의 결혼 후 별다른 수입이 없었기에 ‘캄차트카’라는 보일러 회사에서 보일러 수리공으로 일하며 음악작업을 계속해 나갔다. <유명하지 않은 노래들>, ,<캄차뜨가의 대장> 의 앨범으로 젊은 세대들에게 나름 이름을 알렸지만 많은 대중들에게 키노를 알리기엔 부족했고 언더그라운드에 제한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수많은 명곡들이 나오게 되었지만 그만큼 많은 시련들도 생겨났었다. 다섯 번째 앨범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는 흥행에 실패 하게 되고 내부 팀원들의 분열과 탈퇴, 새로운 멤버의 영입 등의 문제들을 겪으며 키노는 성숙을 위한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여섯 번째 앨범인 <노치>(밤)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된다. 발매 두 달 정도 만에 50만장이 팔려나갔고 머지않아 200만장을 돌파하게 된다. 다음 앨범을 낼수록 키노의 입지는 점점 더 커져만 갔고 영화에도 출연하여 최우수상을 받았다. 빅토르 최가 출연한 영화 <이글라>는 1988년 소련 역사상 최대인 무려 1500만 명의 관중을 동원했고 그가 영화 속에서 부른 <혈액형>이라는 노래는 7번째 앨범의 제목이자 그를 대표하는 곡 중 하나가 되었다.

 

치뤄야 할 대가가 아무리 크다 해도,

헐값의 승리는 바라지도 않는다.

전우의 가슴을 밟고 싶지 않기에...

너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단지 너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그러나 하늘 높이 솟은 별은 나를 전장으로 불러낸다.

내 소매 위에는 혈액형

내 소매 위에는 나의 군번

전투로 향하는 내게 행운을 빌어주게

이 들판에 남게 되지 않기를

이 들판에 남게 되지 않기를

전투로 향하는 내게 행운을 빌어주게

 

빅토르 최의 노래 - 혈액형 중에서

 

이어 여덟 번째 앨범에서 혈액형에 버금가는 인기와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는 곡이 나오게 된다. <마지막 영웅>이라는 여덟 번째 앨범에 들어있던 곡이 바로 <뻬레멘>(변화)라는 곡이다. 여덟 번째 앨범은 키노와 러시아인들의 목소리가 합쳐져 모스크바 올림픽 경기장의 록 콘서트현장에서 불리어졌다. 10만 명에 다다른 엄청난 관중들은 러시아 역사상 처음이었다. 이미 키노는 역사의 한 대목을 장식할 만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같은 해 <마지막 영웅>과 함께 키노는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인 아홉 번째 앨범을 발표했었고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 또한 엄청난 인기를 끈 상태였다. 키노는 콘서트를 마치고 다음을 기약하며 팬들과 인사했다.

 

 그의 노래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굵직하게 읊조리는 듯한 느낌을 준다. 크고 높은 목소리로 소리치는 록이 아니라 가슴으로 가사를 전달하고 싶어 했던 그의 노래는 시 처럼 단어마다 의미를 지니며 저항정신과 자유를 향한 갈망이 넘치고 있다. 한국에서도 한 대수, 윤도현 밴드 등이 빅토르 최의 곡들을 리바이벌하여 불렀다.

 

빅토르의 노래가 들린다.

싸늘한 그의 무덤 앞에 더 많은 빅토르가 모여

세상을 향해 울부짖는다.

지금도 그의 노래가 끝나지 않은 이유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윤도현 밴드 -혈액형 중 나레이션 부분

 

빅토르 최의 흔적을 찾아

 

빅토르 최가 음악활동을 했던 곳에 위치한 흉상

빅토르 최가 음악활동과 돈을 벌기 위해 지냈던 캄차트카 보일러 회사 지하 공연장

현재는 박물관과 언더그라운드 가수의 공연장으로 이용됨 사진=남궁경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키노의 시작이며 활동 무대였다. 그와 동시에 빅토르 최의 마지막, 그의 무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빅토르 최가 음악활동을 한 보일러실은 아직까지 남아 박물관과 동시에 후대의 언더그라운드 그룹들을 위한 공연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보일러실이 위치한 건물 벽에는 팬들이 그린 그래피티들이 가득하며 그를 잊지 않았다는 문구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사진=남궁경

초이는 살아 있다. 사진=남궁경

박물관 안에 전시된 빅토르 최의 유품과 그의 앨범들 사진=남궁경 

 

 

 모스크바도 예외일 순 없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그리워하는 문구들을 담은 벽을 만들어 내었는데 지금은 빅토르 초이 추모의 벽으로 불린다. 아르바트 거리에 위치한 통곡의 벽은 아직까지도 많은 팬들의 메시지를 담고 초이를 부르고 있다.

 

빅토르 최의 무덤,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초이라는 이름의 별

 

6월 21일 빅토르의 생일이 다가오면서 그가 활동한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는 많은 행사가 있었다. 빅토르 최의 희귀 사진들이 중심대로인 넵스키 대로에서 아직 전시되고 있으며 23일에는 추모 콘서트가 열렸다.

 

-빅토르 최 전시회

‘초이라는 이름의 별’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는 시작 전부터 상트 페테르부르크 전역에 알려졌다. 빅토르 최의 대표 곡 중 하나인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에서 따온 이번 추모 행사의 이름은 얼마나 러시아인들이 그를 사랑했고 아직까지 우상적인 존재로 남아있는지 알게 해준다. 이 전시회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시가 주관하여 44점에 달하는 흑백사진들을 전시한다. 주최 측은 전시회가 끝나면 러시아 작가들의 미술품만을 소장하고 있는 러시아 박물관(루스끼 무제이)에 한 점을 기증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빅토르 최 추모 콘서트

전시회와 더불어 열린 빅토르 최 추모 콘서트에서는 한국의 유명 록그룹 윤도현 밴드가 ‘혈액형’등의 노래를 러시아어와 한국어로 불렀으며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을 영어로 번역하여 부른 미국의 록 밴드 '브라자빌(Brazzaville)등 세계의 많은 가수들이 참가하여 추모열기를 더했다.

 

떠나간 전설.

 

“아무도 믿지 않는다, 아니 믿을 수 없다”-빅토르 최 사망 다음날 신문 기사 첫머리

 

빅토르 최는 순회 콘서트와 휴식을 위하여 당시 소련영토였던 라트비아에 간다. 1990년 8월 15일 낚시를 하고 집으로 혼자 돌아오던 도중 그는 앞에서 달려오는 대형 버스와 충돌하는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다. 10m이상 뒤로 밀려나 핸들에 가슴을 찍혀 그 자리에서 별은 팬들의 곁을 떠나게 되었다. 빅토르 최의 찌그러진 자동차에서는 운명처럼 마지막 녹음 테이프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 녹음테이프는 후에 다른 멤버들의 작업이 붙여져 <쵸르늬 앨범> (검은 앨범)으로 탄생하였고 그의 사망 10주년에는 마지막 앨범을 소장하려는 사람들이 몰려 엄청난 가격에 암거래로 구할 수 있는 희귀한 앨범이 된다.

 

 그러나 그의 죽음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들이 남아있었다. 대형 버스의 운전자가 너무도 빠른 기간 안에 풀려나게 되었고 그는 종적을 감추었다. 당시 고르바초프와 친분이 있었던 그의 영향력이 두려워 보수파가 나섰을 것이란 추측 등이 있다. 그의 죽음에서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는 이유로 KGB 암살설, 보수파 개입설 등의 사회적 혼란이 야기되었고 전 러시아에서 초이를 따라 죽음의 길을 선택한 여인들이 생겨나고 그의 장례식은 연기되기도 하였다.

자유라는 이름을 위해 가장 앞에서 자신들을 이끌어주던 별이, 러시아 최초의 록을 연주하던 별이, 러시아와 한국의 피를 받아 자신의 두 번째 나라 한국에 가고 싶어 했던 초이라는 이름의 별이 한국 공연 두 달을 남겨두고 떠나간 것이다. 할아버지의 나라에서 공연요청이 들어와 기쁜 감정을 감추지 않았던 빅토르 최는 할아버지의 나라이자 자신의 뿌리를 알기도 전에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나고야 말았다. 공교롭게도 우리 민족 해방을 이루어 내었던 8월 15일이 자유와 변화를 추구하던 빅토르 최의 사망일이라는 사실에 몇몇 팬들은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다른 모든 공연을 연기하는 한이 있어도 서울공연은 꼭 하고 싶다.” - 빅토르 최

 

그의 간절한 소원이었던 한국 공연을 하지 못하고 떠났다는 것 때문인지, 그의 성과 생김새가 우리와 너무나 닮았기 때문인지 취재 내내 그가 읊조렸던 가사는 아직도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는 떠났지만 그의 정신은 러시아인들 마음속에 함께하며 자유를 외치는 상징, 초이라는 이름의 별이 되어 러시아인을 이끌고 있다. 자유를 향해 싸우라고, 우리 손으로 변화를 가져오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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