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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내게로 왔다, 세 채의 집 그리고 빠블로 네루다

작성일2012.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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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기자단

<시(La poesia)>

- 빠블로 네루다(Pablo Neruda)

“그러니까 그 나이였다. 시가 날 찾아왔다. 난 모른다, 어디서 왔는지 겨울에 선지 강에 선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중략)”

 

한번쯤 들어봤을 법한 김용택 시인의 베스트셀러 제목인 ‘시가 내게로 왔다’는 사실 칠레 시인 빠블로 네루다의 작품의 한 구절이다. 지구 반대편의 시인을 감동시킨 네루다의 시는 세월이 지날수록 칠레 국민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의 사랑을 얻고 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또 사회주의 정치인으로 숱한 이야기를 남기고 간 네루다. 이번 기사에서는 산띠아고, 발빠라이소 그리고 이슬라 네그라에 있는 시인의 집에서 한편의 시 같은 그의 삶을 둘러본다.

 

1953년, 네루다는 당시 비밀 연인이었던 마띨데 우루띠아(Matilde Urrutia)를 위해 산띠아고에 집 한 채를 짓기 시작한다. 이름은 ‘헝클어진 머리’라는 뜻을 가진 그녀의 별명, ‘라 차스꼬나.’ 산 끄리스또발(San Cristobal)언덕에서 흘러 내려오는 계곡물과 블랙베리가 흐드러진 이곳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곳곳에 마띨데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거실에서는 안데스산맥으로 둘러싸인 산띠아고의 경치를 즐길 수 있다. 특히 눈여겨 볼 것은 신실한 친구였던 멕시코 화가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가 그린 머리 두 개의 마띨다. 친구이자 비밀연인이었던 그녀의 두 속성을 표현한 것으로, 헝클어진 머리칼을 잘 살펴보면 시인의 얼굴을 찾을 수 있다. 디에고 처럼 많은 네루다의 친구들은 이 비밀 연인을 지지했다고 한다.

 

(사진출처 네루다재단)

라 차스꼬나가 계속해서 시인과 연인의 비밀 정원으로 남은 것은 아니다. 1973년, 피노체트(Pinochet) 군사 정권의 쿠데타 후 네루다는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만다. 세계 최초로 민주 선거를 통해 집권한 사회주의 대통령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가 대통령궁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지 딱 3일만이었다. 시인의 장례식은 계엄령에도 불구하고 치러졌지만 행복했던 집은 반대파에 의해 여기저기 무너지고 진흙으로 덮이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사진출처 네루다재단)

네루다의 죽음 이후 홀로 지낸 마띨다의 침실. 그녀는 시인의 집을 보호하기 위해 피노체트 독재 기간 내내 칠레에 머물었고 네루다 재단의 설립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원래 가수였던 그녀는 네루다와 사랑에 빠진 후 그의 공식적인 대외활동을 지원하는 비서 역할을 했다. 시인의 죽음 이후에도 라 차스꼬나에서 민주화 운동을 지원했던 그녀는 네루다의 살아있는 시였다.

 

(사진출처 네루다재단)

산띠아고에 싫증을 느낀 시인은 1959년 1시간 반 거리에 위치한 항구도시 발빠라이소(Valparaiso)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한다. 플로리다(Florida) 언덕에 위치한 라 세바스띠아나는 탑 형상을 하고 있는데 네루다는 3층, 4층 그리고 탑을 소유하고 나머지는 친구 부부의 몫이었다. 이를 두고 그는 “내가졌어. 계단과 발코니만 사버렸군!”이라는 농담을 자주 했다.

 

하지만 실제로 네루다는 승자였다. 탑에서 내려다 본 환상적인 전망을 소유했기 때문이다. 시인은 발빠라이소에서 새해를 맞이하기를 즐겼고 라 세바스띠아나는 항구의 불꽃축제를 관람하기에 안성맞춤인 발코니 역할을 했다. 그는 방문객들을 탑으로 인도하고는 망원경으로 한 방향을 볼 것을 지시하곤 했다. 그쪽 지붕위에서 벌거벗은 여자가 선탠을 하곤 한다나…. 하지만 아무도 그녀를 볼 수 없었다. (어쩌면 그녀는 시인에게만 나타났는지도 모른다.)

 

(사진출처 네루다재단)

오래 머물진 않았지만 작은 서재를 마련한 네루다는 여기서 집의 이름인 ‘라 세바스띠아나’라는 시를 쓴다. “내가 집을 한 채 지었지. 먼저 공기로. 그리곤 공기 위를 올라가 깃발을 걸었지. 창공의, 별들의, 밝음의, 그리고 어둠의...(중략)” 그는 항상 초록 잉크로 시를 써내려갔는데, 책상 위에는 라 세바스띠아나와 함께 몇몇 시의 초안이 보존되어 있다. 항상 “다음 생에는 독수리로 태어나고 싶다”고 했던 네루다. 그가 죽은 후 이 집에는 어떻게 들어왔는지 의문스러운 독수리 한 마리가 울어대고 있었다고 한다.

 

“동지들이여, 이슬라 네그라에 나를 묻어주게. 내가 아는 그 바다, 물결과 돌멩이로 주름 잡힌 그곳 앞에. 잃어버린 내 눈은 그들을 다시 보지 못할테지...”

 

파도의 함성만이 울려 퍼지는 조용한 시골 마을 이슬라 네그라에는 시인과 그의 연인이 잠들어있다. 그의 생애,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이곳에 영원히 잠들고 싶었던 네루다의 바람은 즉시 이뤄지지는 못했다. 군사정권의 압박 하에 산띠아고 공동묘지에 매장된 것이다. 그리고 20여년이 지난 92년에야 민주 정부의 공식 장례식을 거쳐 이곳으로 돌아온다.

 

“바다의 연인이자 땅의 항해사”로 불린 네루다. 1927년 3달간의 배 여행 이후 바다와 배에 매료된 네루다는 전 세계 각국에서 항해용품을 수집한다. 길고 좁은 통로로 연결된 집의 구조도 선실과 닮았다. 그 외 조각상, 곤충, 가면, 병, 배 모형, 고지도, 다루지도 못하는 악기 등 수많은 물건을 집에 전시해 놓는데 이는 대부분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단다. 쿠데타 직후 회색빛 산띠아고에서 생을 마감하기 전 까지 이곳에서 시인은 흰 거품을 뿜어대는 검은 바다를 보며 수많은 시를 써내려갔다.

 

네루다는 긴 여행 혹은 부재 후 이슬라 네그라로 돌아오면 그의 귀환을 친구들에게 알리기 위해 종을 울렸다. 1939년 집이 완성되기도 전에 한 스페인 선장에게서 구입한 종은 언젠가 다시 울려 퍼지길 기원하며 바닷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기적이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믿었다고 하는 시인처럼 언젠가 종이 다시 울리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

 

“모두 배에 올라타고 있었지... 그들에게 조국을 찾아주려는 내 시의 투쟁은 성공했어. 그리고 난 자랑스러움을 느꼈네.”

 

“내 심장을 위해선 너의 가슴 하나면 족하고 너의 자유를 위해선 내 날개만 있으면 족하다. 네 영혼위에 내가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은 내 입으로부터 하늘까지 가 닿으리라.”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 중

 

산띠아고 대학을 다니는 에스떼반(Esteban)은 말한다. “작가를 지망하는 내게 있어 네루다는 위대한 본보기야.” 그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칠레인들이 네루다의 시 한편 정도는 외우고 있을 정도다. 시인이 숨 쉬던 집을 찾는 발걸음은 계속 이어질 것이고 그가 사랑한 민중들 또한 그를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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