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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 속에서 꽃을 피워낸 예술가, 이중섭

작성일2012.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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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기자단

 

 

 

 

 

우리가 아름답다고 부르는 것들의 이면에는 어떤 것들이 숨어 있을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아름다운 음악, 아름다운 시, 아름다운 예술작품. 그들이 세상에 나오기 위해 거쳐간 예술가들의 손길과 인생은 때로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우울하다. 이렇게 때로 우리 주변의 아름다운 것들은 무척이나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예술작품들을 감상하는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작가의 생애에 대해 공부하고 작품과 함께 연관 지어 분석해 보는 것이다. 여기, 극도의 우울과 고달픈 삶 속에서 살았지만 그 안에서 피워낸 작품을 통해 긴 시간 동안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으며 오랫동안 기억되고 있는 천재 예술가가 있다. 그의 인생 이야기와 함께 작품을 감상해 보자.

 

 

 

 

 

 

 

 

 

이중섭은 평안남도 평원에서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학교 공부보다는 그림에 열중하며 예술에 대한 재능을 어렸을 때부터 보였다고 한다.
지망하던 평양고등보통학교에서 낙방하고 오산학교에 입학한 이중섭은 예일대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했던 임용련을 미술선생님으로 만나게 되었는데, 그가 유난히 습작 드로잉 작품을 많이 남기게 된 데에는 습작의 중요성을 언제나 강조했던 임용련의 영향이 컸다.
1935년에 일본 도쿄, 제국미술학교 서양학과에 입학하면서 이중섭은 본격적으로 미술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분카가쿠엔(文化學院)의 전위적인 분위기에 끌려 제국미술학교를 중퇴하고 분카가쿠엔 미술과에 입학하게 되며 강렬하고 자유로운 선묘력을 나타내는 그의 조형세계를 만들어간다. 그리고, 바로 이 곳에서 부인 ‘야마모토 마사코’를 만난다.

 

1944년,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이중섭은 분카가쿠엔을 졸업한 후, 연인 마사코를 일본에 남겨두고 원산으로 돌아온다. 다음 해, 마사코가 한국으로 옮겨왔으며 둘은 결혼한다.
그로부터 1년 후 첫 아이가 태어났지만 질병으로 인해 아이를 잃게 되는데, 아이를 잃은 슬픔은 이중섭에게 큰 충격을 남겼다. 아이의 죽음으로 인해 겪은 아픔을 모티프로 한 작품이 [하얀 별을 안고 하늘을 나는 어린이]이다.


625전쟁이 발발 이후, 이중섭은 이 고통스러운 역사 속에서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계속하게 된다. 1947년 첫째 아들 태현이 태어났고, 2년 후인 1949년, 둘째 태성이 태어난다. 이후, 부인 마사코, 두 아들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길을 떠난다. 하지만 곧 전세의 위급함을 느낀 이중섭과 가족들은 그가 서른 여섯 살이 되던 해 부산을 떠나 제주로 피난하게 된다.
비록 피난길로 떠난 곳이었지만, 가족과 함께한 제주에서의 생활은 이중섭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비추어진다. 제주에 도착한 이중섭 가족은 며칠 동안을 걸어 서귀포에 닿았고, 현지 주민이 방을 내 주어 그 곳에 삶의 터전을 잡게 되었는데, 가난했던 그들은 피난민을 위한 배급품과 고구마, 바다에서 잡은 게를 반찬으로 삼아 끼니를 이어갔다. 이중섭은 ‘게’ 그림을 즐겨 그리기도 했는데, 이 시절 게를 무척 많이 잡아 먹는 바람에 게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랬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서귀포에서 이중섭은 '서귀포의 환상' '아이들과 게' '물고기' '섶 섬이 보이는 풍경' 등의 작품을 남겼는데, 이 그림들은 가족들과 함께 했던 제주에서의 행복했던 기억을 그림으로 남긴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서귀포의 환상’은 따뜻한 색감과 하얀 새를 타고 날아다니는 아이들, 그리고 주렁주렁 열린 감귤나무는 풍요롭고 평화로운 낙원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계속되는 생활고에 고통을 겪던 이중섭의 가족들은 극심한 가난을 견디지 못해, 결국 1952년, 마사코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내자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두 아들과 부인 마사코에게 보내는 그림 편지를 쓰게 된 것이 바로 이 때부터라고 한다. 이 후 이중섭은 부두노동으로 번 돈으로 1953년 도쿄에서 가족들을 5일간 만났지만, 그 짧은 만남을 끝으로 부인 마사코, 그리고 두 아들과 영영 이별하게 되었다. 그의 그림에 유난히 아이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도 두 아들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가슴 아픈 이별은 아이러니하게도 예술가 이중섭의 인생의 걸작을 남기는 계기로 작용한다.
1954년까지 지인의 도움을 받으며 통영에 머무르던 그는 [소] 연작과 [부부] 등 한국미술의 대표작을 쏟아내게 된다.

 

 

 

 

 

 

 

 

무엇보다 ‘소’는 이중섭을 대표하는 작품의 소재인데, 이 시기 그가 선보인 [소]연작은 그의 작품 중 대표작으로 꼽힌다. 채 10호(약45X53cm)가 되지 않는 비교적 작은 크기의 [소]연작들은 비록 그림의 크기는 작은 편이지만, 강렬한 선과 표현력으로 엄청난 에너지를 뿜어낸다. 이 작품들은 이중섭의 고뇌와 연민, 갈망, 광기, 우직함, 집념 등 그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는 평을 받는다.

이중섭의 생애를 보여주는 것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종이를 살 돈이 없어 담배 내부 포장지인 은지에 그린 그림들과 일본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낸 그림 편지들이다.

 

 

 

 

 

 

  그가 일본으로 떠난 아내와 두 아들을 그리워하며 그려 보낸 그림편지, [화목]은 따뜻한 색감과 함께 이중섭 자신과 아내, 그리고 두 아들의 행복한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데 이렇게 행복한 모습들이 그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난 때문에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고 그리움과 외로움으로 가득 찬 그의 인생을 떠올려 보면 그의 진한 슬픔이 그림에서 묻어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중섭은 1951년 한 해 동안 무려 80점 가량을 아내와 자식들에게 그려 보냈다고 한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이중섭은 이렇게 그림을 통해 풀어냈다. 그는 전시회를 열어 그림을 팔아 돈을 벌어 일본으로 가족들을 만나러 가겠다는 생각 하나로 그림을 그리고 돈을 모았다. 그리고 다행히 절실함으로 준비한 그의 전시회는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언론의 호평을 얻었고 전시장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드디어 일본에 있는 부인과 아들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들뜬 마음을 안고 있었다. 그림을 많이 팔았지만 어수룩했던 이중섭은 수금을 제대로 하지 못해 이리저리 돈을 떼이고 받지 못하는 바람에 수중에 들어온 돈은 많지 않았다.
그토록 간절히 바랬던 가족들과의 만남이 좌절되자 이중섭은 실의에 빠진 술에 의지하게 된다. 더 이상 가족을 볼 수 없다는 커다란 절망감에 빠져 그는 그의 삶을 미련 없이 버리기로 하고, 술과 자학, 영양부족과 신경쇠약으로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기에 이른다.
이중섭은 병원과 사촌 집을 전전하다가, 결국 서대문 적십자병원의 차가운 병실 바닥에서 홀로 숨을 거둔다. 

 

  이 천재화가는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가난과 가족에 대한 극심한 그리움과 홀로 외롭게 싸웠지만 그의 작품들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아름다움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그 이름은 명예롭게 오르내리고 있다.
비록 슬픈 이야기로 가득한 그의 삶이지만 이제 이중섭과 그의 작품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하기 쉽지 않은가 아마도 다음 번에 그의 작품을 만나면 친근함으로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언제든지 만나 서로의 길고 고단한 이야기를 잔뜩 털어놓는 친구를 만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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