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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나에서 유니세프 친선대사까지, '오드리 헵번'

작성일2012.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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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기자단

 

 

 공중파, 케이블 방송 할것 없이 여자들의 美에 관한 프로그램이 점점 많아지고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다. 외적인 이미지도 재산이며 능력으로 치부되는 오늘날, 내적인 아름다움에 관해서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안젤리나 졸리처럼 아름다운 입술, 모델 장윤주처럼 날씬한 몸매, 소녀시대의 티파니처럼 아름다운 눈을 가지고 싶다면 마음이 더 아름다웠던 이 여성, 오드리 헵번을 주목하자.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홀리 역을 맡은 오드리 헵번.
티파니 상점에서의 이 장면은 현재까지도 많은 패러디가 나올 만큼 너무나도 유명하다.(출처:네이버 영화)|
 

 

 오드리 헵번은 알다시피 고전 할리우드 영화계를 주름 잡던 뛰어난 미모의 영화배우 중 한 명이다. 유명 보석 상점 티파니에서 검은색 드레스와 큰 선글라스 착용하고 그녀의 상징인 올림머리를 한 채, 페스츄리를 먹으며 쇼윈도우를 들여다보는 장면은 오드리 헵번에게 있어 한 브랜드의 엠블럼처럼 기억된다. 그뿐만 아니라, 앤 공주역으로 스페인 광장의 계단 언저리에서 젤라또를 먹는 장면도 떠오를 것이다. <티파니에서 아침을>, <로마의 휴일> 등의 명작으로 그녀는 우리에게 그녀만의 상징이 된 귀여운 앞머리와 활발하고 명랑한 요정 같은 이미지로 기억에 남았다. 

 

 

 

 

|오드리 헵번이 출연한 영화에서 종종 발레를 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왼쪽) 1946년, 17세 때의 발레교습을 받는 오드리 헵번.
(중앙과 오른쪽) 영화 <시크릿 피플>과 <퍼니 페이스>에서의 발레 장면.|
 

 

 하지만 그녀는 처음부터 영화배우를 꿈꿨던 것은 아니다. 오드리 헵번은 어렸을 적부터 발레리나가 되기를 원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당시, 10대였던 오드리 헵번은 발레리나 수업을 받고 있었다. 전쟁 탓에 굶주린 아이들과 함께 순무 뿌리, 꽃의 알뿌리를 날 것으로 하루 한 끼 식사를 연명하면서도 발레에 대한 열정을 이어갔다. 그러나 전쟁의 참혹한 현실을 그녀도 피해 갈 수 없었다. 그녀는 빈혈, 부종, 황달, 영양실조를 겪으며 생사를 넘나들었다. “그 시절 나는 나 자신에게 말하곤 했어요. 이 전쟁이 끝나면 다시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불평하지 않겠다고요.”라고 전쟁의 상처를 내뱉었던 그녀에게서 느낄 수 있듯이 하루하루를 정신력으로 버텼다. 그러던 중, 다행히도 유니세프의 전신인 유엔구제부흥기구에서 받은 음식으로 점차 회복할 수 있었다. 그녀가 이후 노년의 삶을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보내게 되는데, 이 때 닿은 인연 또한 작용하지 않았을까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장점만을 보면서, 스스로에게는 냉철했던 오드리 헵번. 전력을 다해 노력했지만 그 시대 최고의 발레리나와 비교했을 때 그녀의 능력은 그에 달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발레리나로의 꿈을 접었다. 이후 코미디 뮤지컬 단원 및 각종 영화에서의 단역을 맡게 되고, 신인 중의 신인이었던 그녀는 최고의 여배우였던 마릴린 먼로에게 돌아갈 뻔한 앤 공주역의 <로마의 휴일> 출연으로 영화배우의 인생을 꽃피우게 된다. 

 

 

 

 

|여우주연상 수상의 명예를 안겨주었던 영화 <로마의 휴일>. 

실제 공주가 표현하기에도 그녀는 앤 공주라고 해도 될 정도로 몰입한 연기를 펼쳤다.|  

 

 미국, 영국 등지에서 여우주연상 수상의 쾌거를 이룬 그녀는 그 이후로도 승승장구하여 영화배우로서의 빛나는 세월을 보냈다. 더욱이 오드리 헵번의 정형화된 클래식 하면서도 귀여운 스타일이 많은 여성에게도 큰 인기를 끌게 되어 사회적으로도 영향력이 있게 된다. 그렇게 성공 대로를 걷기 전, 하나의 해프닝이 있었다. 오드리 헵번이 정식으로 스크린관에 나타나기 전에 그녀와 이름이 비슷한 캐서린 헵번이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녀를 관리하던 회사에서는 이름을 바꿀 것을 권유했지만, 자신을 인정하는 것은 내 이름도 인정하는 것이라며 강단진 근성을 드러냈다. 그 근성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이의 롤모델이 되도록 일조했다. 이렇게 영화배우로서의 성공적인 삶을 살아왔지만, ‘여자’ 오드리 헵번의 인생은 그리 평탄치만은 않았다. 이혼한 그녀의 부모님과 달리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꾼 그녀지만, 결국 이혼을 하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우울증까지 겹쳤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녀가 그토록 원했던 임신도 여러 차례 실패로 이어졌다. 이러한 상처를 겪고 난 뒤에 사는 영화배우로서의 삶은 마치 식어버린 커피와도 같았다. 커피의 맛은 남아있지만, 무언가 그녀를 만족스럽게 하기에는 완벽하지 못했다. 오드리 헵번은 이때 자신이 필요로 되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활동한 모습들. 

언제나 낮은 자세로 아이들의 눈높이를 맞춰 인사하고, 미소짓고, 보듬어 주었다.|  

 

 바로 전 세계 아이들의 어머니가 된 것이다. 1987년, 오드리 헵번은 여행 중 총 수익금을 유니세프로 전달하는 국제 음악 페스티벌 행사에 초대받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녀의 남은 인생은 달라졌다. 유니세프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고, 결국 다음 해 3월 8일 유니세프 친선대사가 되었다. 1년당 보수는 단돈 1달러. 도움의 손길을 뻗는 곳에는 언제나 함께 했다. 그녀가 표현하길, “그곳에는 영화배우인 제가 없었어요. 단지 펑퍼짐한 카키색 바지를 입은 저와 제 두 손가락을 합친 둘레만큼의 다리를 가진 아이들만 있을 뿐이에요.” 오드리 헵번은 큰 키를 가진 자신을 혹여나 경계할까 염려스러워 늘 허리를 낮춰 다가갔다. 유니세프 활동으로 쉰 번이 넘도록 제 3세계의 재난 지역에서 구호활동을 펼쳤고, 기근을 해결하기 위해 각종 연설과 모금 활동도 수차례나 진행했다. 

 

 

 

 

 오드리 헵번은 모든 여성은 그녀처럼 머리를 틀어올리고 큰 선글라스를 쓰고, 진주 목걸이와 검은 민소매 원피스를 입으면 자신처럼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오드리 헵번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닮고 싶다면 그녀가 가졌던 마음을 들여다보자. 2차 세계 대전 중 오드리 헵번의 어머니가 “너에게 오렌지 주스를 주었으면…. 우유와 달걀을 주면 좋을 텐데….”라며 다음 날 먹을 음식을 걱정하는 마음을, 전 세계의 가엾은 아이를 도우면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던 오드리 헵번. 어린 나이에 전쟁을 눈앞에서 겪으며 느꼈을 그 고통을, 자신이 갖춘 능력으로 어렸을 때 자신이 느낀 감정을 고스란히 겪고 있었던 아이들을 돕는데 여생을 바쳤다. 그런 그녀의 주름살 하나까지도 아름다운 만인의 어머니가 된 오드리 헵번의 인생을 통해 바르고 아름다운 마음에 대해 재성찰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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