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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치니 억", 어느 한 청년의 비극

작성일2013.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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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기자단

 

  박정희 군부독재 시대를 부정하였던 23살의 한 청년은 민주화를 꿈꾸며 사회활동을 벌이다 어느 건장한 남자들에게 붙잡혀 눈을 가린 채, 어딘가에 끌려가게 되는데... 1987년, 익숙한 열차의 소리가 들리는 서울에 위치한 남영동. 고문을 당하던 청년은 정신을 차려보니 열차의 소리를 들으며, 이 곳이 남영동에 위치한 대공분실임을 알게 된다. 자신을 '빨갱이' 로 몰아가려는 고문경찰들의 압박을 견디던 청년. 물고문, 전기고문과 같은 악랄한 고문을 견디다 결국 비극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탁치니 억!', 이 말은 청년이 고문을 당하다가 비극을 맞이한 순간을 의미한다.  

 

 

 


 

  고문에 비극을 당한 청년은 바로 고 박종철 열사이다. 그는 서울대학교 학생이었으며, 당시 수배중인 선배 박종운씨의 소재를 파악하려던 경찰에 의해 참고인 자격으로 연행되었다. 선배와의 의리를 위해 소재를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고, 잔혹한 고문과 폭행으로 결국 1987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사망하고 만다. 이 때 경찰의 발표는 "탁 하고 치니, 억하고 죽더라" 라고 하는데, 거짓으로 드러나며 고문에 의한 사망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이러한 경찰의 궤변은 한동안 악랄한 군부지배체제를 조롱하는 유행어로 퍼졌다. 

 

 

 

 


 

  현재의 남영동의 대공분실,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을까 과거의 대공분실은 서울 용산구 갈월동 88번지에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로 운영되고 있으며, 평일에 한해서 무료개방을 실시하고 있다. 대공분실은 1호선 남영역의 인근에 위치하고 있기에 철길을 다니는 열차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었으며, 1980년대 당시 고문을 받던 자들은 심심찮게 열차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이 열차소리는 세상과 단절되어 절망한 고문받는 자들에게 바깥 세상과 연결시켜주는 유일한 끈일지도... 

 

 


  과거의 잔혹한 현장이 살아 숨쉬는 대공분실의 현장을 직접 찾아가보았다. 건물의 외관에서 눈에 띄었던 점은 고문실이었던 5층 창문이 다른 층의 창문과 달리 가느다란 모습의 창문이라는 점이다. 5층의 창문은 마치 고문받는 자에게 희망의 빛줄기조차 없는 암흑의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대공분실의 내부로 들어가 고문을 받던 5층으로 올라가보기 위해 건물 뒷편으로 가보았다. 1987년, 군부지배체제를 반대하던 젊은 학생들을 건물 뒷편을 통해 고문실로 끌고 올라갔다. 뒷편 입구를 통해 들어가면 철제로 된 원형계단을 통해서 5층으로 올라간다. 이러한 계단구조는 피고문자가 위치감각을 상실하게 하여 고문실이 몇 층인지 모르도록 의도한 점을 알 수 있다. 5층에 올라오면 복도에서 수 많은 고문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터벅터벅 고문실 앞을 지나면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는 낯선 공간으로 끌려와 두려운 마음, 한편으론 군부지배체제에 반대하여 고문 받으러 가는 길에도 청년들의 강인한 다짐이 느껴지는 듯 했다. 고문실은 서로 지그재그로 만드는 치밀함까지 엿볼 수 있었다. 이러한 치밀한 구조들은 심리적인 장치를 사용하여 고문 받는 자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고문실의 내부로 들어서니 음침함과 어두움이 드리워있었다. 고문실에 있다 보니 수 많은 청년들이 고문을 받으며 고통의 목소리가 아닌, 민주화를 위한 통곡의 외침이 들리는 듯 했다. 수 많은 고문실 중에서도 9호실은 앞서 등장한 청년인 고 박종철 열사가 고문을 받던 곳이다. 지금은 당시의 침대와 가구 등을 복원하여 그의 슬픔이 묻어있다. 고문실의 내부 모습은 피고문자의 인권이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낮은 칸막이와 잘 보이지 않는 내부를 감시하는 CCTV를 통해 공간을 지배하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또 다른 15호실에는 고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고문을 당했던 공간도 있다. 그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어 안타까운 일을 겪었는데, 아쉽게도 이 곳은 복원이 되어있질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 지난 과오를 씻어내기 위해선 이러한 역사적인 현장을 복구하고 보존하여 교육의 현장으로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고문실의 내부에서 나와 아래층인 4층에는 고 박종철 열사의 기념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가 사망 당시 입었던 옷을 포함하여 책이나 편지 등을 볼 수 있었다. 고 박종철 열사와 고 김근태 전의원은 서울대생이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다 희생된 서울대 출신 학생 18명(박종철 포함)을 기리는 마음으로 학교에 '민주화의 길'을 만들었다. 고문이라는 부당한 방법으로 세상을 떠난 고 박종철 열사는 자신을 위한 기념 전시실과 민주화의 길을 보고서 자신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음에 하늘에서 웃고 있지 않을까. 

 


 

 

  

  남영동 대공분실을 직접 가지 않아도 고문장의 현장 분위기를 더욱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바로 대공분실의 배경으로 만들어진 <남영동 1985> 영화를 통해서 말이다. 민주화 투사의 주인공 '김종태'는 고 김근태 의원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인물이다. 민주화 투사답게 경찰서에 자주 들락거리던 그는 어느 날,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와 함께 목욕탕에서 나오던 차에 경찰 둘에게 연행된다. 그는 갑자기 눈을 수건으로 가려진 채 정체모를 곳으로 끌려가게 되는데, 그 곳은 바로 남영동 대공분실이다. 박정희 군부지배체제를 반대하였던 그는 잦은 폭행과 물고문을 당하면서 생사를 드나들었지만 자신의 신념은 여전히 가지처럼 꼿꼿하였다.  

 

 

  이 영화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점은 고문 기술자 '이두한' 인물이다. 고문경찰들의 물고문과 폭행으로도 김종태에게 효과가 없자 이두한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그는 더욱 더 강도 높은 고문을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김종태의 인내의 한계를 자유자재로 조절한다. 마침내 김종태는 강력한 고문을 겪어내지 못하며 두 손을 들게 된다. 결국 악랄한 고문에 무릎을 꿇은 김종태는 한 때 다시 제 정신으로 돌아와 자신은 빨갱이가 아니라는 외침에 또 다시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고문을 할 때 사용하는 물건이 등장하기만 하면 치를 떨며 또 다시 굴복하는 그의 모습에서 육체는 물론 정신적으로 피폐하게 만드는 고문의 위력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이두한 고문 기술자를 모티브로 한 실존 인물은 '이근안' 고문 기술자이다. 그는 현재 생존해 있으며 수감생활 중 성경 공부를 하면서 목사가 되기도 했다.

 

 

 

 

  경찰의 악랄함과 인권유린의 현장이었던 남영동의 대공분실, 이제 그곳은 인권 교육의 현장으로 변화하였다. 대공분실의 부정적인 진실을 감추지 않고 오히려 개방하는 경찰의 자세에서 지난 과오를 씻기 위한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살아 숨쉬는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 대공분실에 찾아오는 사람이 적다고 한다. 비록 다들 이러한 역사적인 의미를 글에서나마 보고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한 번 쯤 시간을 내어 고 박종철 열사를 비롯해 민주화 투쟁을 위해 목숨을 맞바꾼 열사들의 정신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가져보는 것을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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