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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고 있었던 충무공 이순신 이야기

작성일2013.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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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기자단

 

학창시절(특히 초등학교 시절) 여러분은 자주 이런 질문을 받았을 겁니다. 

선생님: “자, 여러분은 우리 위인 분들 중에 어느 분을 가장 존경해요”
학생들:” 이순신 장군이요!” 

 

그 시절 이순신 장군은 우리들에게 영웅이요 닮고 싶은 사람이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성장하고 대학에 입학하면서 많은 것을 얻었겠지만 잃는 것도 분명히 있을 겁니다. 우리들이 수없이 많이 들었던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와 조용히 집에서 그리고 학교에서 읽어보았던 위인전 내용을 잊어버렸듯이 말이죠. 그 잊고 살았던, 우리들 가슴 속 영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만나러 가보시겠습니까 

 

 

제가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를 들으러 다녀온 곳은 세종문화회관 입니다. 현재 세종문화회관에서 '충무공 이야기'라는 이순신 장군을 주제로 전시회를 개최 중 입니다. 저와 같이 관심 있는 분들에게는 반드시 의미있는 시간이 되리라 생각이 되고 잊고 있었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다시 만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라 생각이 됩니다.

 

관람안내

시간: 화~일요일 10:30~22:30(입장마감 22:00) 매주 월요일 휴관
문의: 02-399-1114~6
장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대로 175
충무공 이야기 세종문화회관 지하2층
운영: 재단법인 세종문화회관
홈페이지: http://www.sejongstory.or.kr

  

 


 

 

 

 

여러분 모두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1536~1598)를 알고 계실 겁니다. 물론 이 사람이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인 것도 다 알고 계실 텐데요. 센고쿠 시대의 막을 내리며 분열된 일본을 통일 시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륙으로 진출하겠다는 엄청난 계획을 실행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명나라를 치기 위한 길을 빌려 달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조선을 침공하기 시작합니다. 조선을 침공한 일본군은 개전 초기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연이어 조선군의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침공 20여 일 만에 결국 한성을 함락시키고 맙니다. 하지만 조선 관군의 반격이 이루어지고 곳곳에서 일어난 의병들도 일본군에 끝까지 대항합니다.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끄는데 큰 공헌을 한 이순신 장군에게 내려진 시호는 ‘충무’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정2품 이상의 벼슬을 한 사람 가운데 나라에 큰 공이 있으면 사후에 시호를 내렸는데요. 내 몸이 위태로워도 위를 받드는 것을 ‘충’이라 하며 쳐들어오는 적을 물리쳐 치욕을 막는 것을 ‘무’라 한다는 뜻의 충무는 무관에게 가장 영예로운 시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충무’라는 시호를 임진왜란 직후에 바로 내려진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높이 평가되는 이순신 장군의 공적은 순국한 지 45년이 지난 1643년(인조 21년)에 드디어 ‘충무’라는 시호를 받게 됩니다. 이러한 직함은 무관으로서의 소명을 다하고 나라를 위해 한 몸 바친 이순신 장군의 치열했던 삶에 바치는 역사의 훈장이겠습니다.  

 

 

 


끊임없는 도전   “좌절과 절망에서 등을 돌려라!” 

 

22세라는 늦은 나이부터 무예를 익히기 시작한 이순신 장군은 28세에 훈련원 무과별시에 응시하게 됩니다. 하지만 시험 도중 낙마하게 되면서 긴 세월 동안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고 맙니다. 비록 시험에는 떨어졌으나 이순신 장군은 결코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이후 무예 연마에 더욱 정진하여 4년 뒤 드디어 무과시험에 합격하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반드시 적선 몇 척을 남겨 둔 채 물러나야 한다” 

 

이순신 장군은 작전을 짤 때와 전투 중에도 백성의 안전부터 고려하였습니다. 전투에 임할 때마다 부하들에게 적이 타고 도망갈 수 있는 배를 남겨 두라고 당부하였는데 그 이유는 도망칠 배가 없으면 적이 뭍으로 올라가 백성들에게 해를 입힐 것을 우려해 취한 조치였습니다. 죄인의 몸이 되어 한산도에서 서울로 압송될 때 울부짖으며 그의 수레를 따르던 수많은 백성들의 모습에서 이순신 장군에 대한 민심을 알 수 있습니다. 

 

 

 

 

유비무환의 혜안 “편안할 때에 위기를 생각하라!” 

 

이순신 장군은 가까운 나라인 일본이 곧 조선을 침략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일찍이 감지하여 육군 장수인 신립이 수군을 없애야 한다고 임금에게 청을 올렸을 때 수군의 중요성을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바다에서 오는 적을 막는데는 수군이 제일 효과적이고 능률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이순신 장군은 유비무환의 자세로 판옥선과 거북선을 새로 건조하고 총통을 만드는 한편 매일같이 군사 훈련을 통해 전투력을 높여 나갔습니다. 동시에 군량미와 화약, 포탄, 화살 등을 비축하며 수군력을 강화합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 

 

원군에 칠천량 해전에서 크게 패하자 다시 삼도 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이순신 장군에게는 겨우 12척의 전선밖에 없었습니다. 부족한 전선도 문제였으나 일본군에 대한 극도의 공포심을 갖고 있던 병사들의 사기 저하가 더 큰 문제였습니다. 적을 눈앞에 둔 이순신 장군은 병사들의 공포심을 없애고 해전에 자신감을 갖게 하기 위해 훈시로 군사들의 정신력을 강화했으며, 명량 해전에서 선두에 나서 함대를 지휘하였습니다. 또한 뛰어난 전략 전술을 펴 열세였던 해전 상황을 대승리로 이끌게 됩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임진왜란이 시작되고 밀려오는 일본군과 대치하며 싸워야 했던 이순신 장군은 늘 고뇌가 깊었습니다. 나라의 위기를 짊어진 장수였기에 늘 고독했고,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붓을 잡아 임진년부터 전사하기 전까지 무려 7년 동안 방대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것이 바로 <난중일기>입니다.


<난중일기>는 임진년 1월1일부터 전사하기 전까지를 기록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일기입니다. 진중이었지만 날짜를 꼬박꼬박 적었고, 그 날의 날씨까지 기록해 놓는 정성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날그날의 공무뿐만 아니라 동료, 친척과의 왕래부터 수군 통제에 관한 일들을 세세하게 적고 있습니다.

<선거이 수사와 작별하며, 1595년 을미년 9월 14일 난중일기>

북쪽에 갔을 때도 같이 일하고
남쪽에 와 사생결단 같이하였소
오늘 밤 이 달 아래 진을 들고는
내일이면 우리 서로 나뉘겠구려 

 

 

 

 

 

 

 

 

 

 

 

 

거북선 앞/뒤 모습(전시된 거북선은 해군 사관 학교의 거북선 모형을 기준으로 하였고, 규모는 실물을 55% 크기로 축소한 것이다) 

 

 

당대 세계 최고의 돌격선이라 불리우는 거북선!  

 

 


 

거북선은 주력함이었던 판옥선을 기반으로 제작된 돌격선 입니다. 적진을 종횡으로 뚫고 들어가 전열을 무너뜨리는 것이 주 임무였으며 전투원이 적의 공격에 노출될 수 있는 판옥선의 약점을 보완하고, 적선에 근접하여 함포를 쏠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거북선의 활약으로 조선 수군은 해전에서 크게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축소 전시된 거북선의 내부 모습

 

 


 

축소 전시된 거북선의 내부 모습

 

 

 


용머리 - 대형 화포를 설치하여 전방의 적선에 화포 공격을 하였습니다. 

 

대포 - 전후 좌우에 화포가 설치되었다. 어느 방향에서나 화포 공격이 가능하여 적들이 함부로 다가오지 못하였습니다.(일본군의 공격에 사방에서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설계)

 

갑판 - 활을 쏘는 사부와 노를 젓는 격군, 화기를 이용해 싸우는 포수가 활동하는 공간입니다.

 

등 - 배 위에 덮개를 씌워 적군과 조선 수군이 직접 맞싸우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한 등에 쇠못을 꽂아 적군이 배 위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였다. (일본 수군이 백병전에 강했으므로, 거북선은 배 위를 판자로 덮고, 또 그 위에 촘촘히 쇠못을 꽂아 검술에 능했던 일본군이 배에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건조하였습니다.

 

 - 거북선의 노는 선채 안폭에 배치되어 있어 다른 배와 충돌을 하여도 부딪치지 않고 계속 노를 저을 수 있었습니다.


자세히 하나하나를 둘러보면 거북선에 녹아 있는 이순신 장군의 창의력과 섬세함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라를 위해 그 뛰어난 창의력과 섬세함을 투자했다는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전쟁을 대비하여 만들기 시작한 거북선의 제작이 완료되고 난 하루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맙니다.

 

 


조선의 주력 전투함으로써 용맹함을 떨친 판옥선! 

 

판옥선은 1555년(명종 10년)에 만든 신형 전투함으로 그 전까지는 조선 전기에 개발된 맹선을 주로 사용하였습니다. 화포로 무장하고 규모를 키운 일본 군선이 침략해 오자 조선의 맹선으로는 격퇴하기가 어렵게 됩니다. 이에 맞서기 위해 배의 규모를 크게 키우고 상장 갑판을 설치하여 전투원과 비전투원의 공간을 나누어 만든 것이 바로 판옥선 입니다. 기동성이 좋고 견고한 판옥선은 을묘왜변 이후에는 가장 중요한 전투함 역할을 하게 됩니다. 임진왜란 때에는 조선 수군의 주력 전투함으로 거북선과 더불어 많은 활약을 하였습니다.

 


일본의 전투함과 명나라의 전투함 

 

 

 

 


 

 

 

 

조선 수군이 처음으로 전쟁에 참여한 것은 임진왜란이 시작된 지 20여 일이 지난 옥포 앞바다에서였는데, 해안가에 배를 정박하고 약탈을 하고 있던 일본군을 화포와 화살로 공격하여 순식간에 26척을 분멸하면서 첫 승전고를 울렸습니다. 조선 수군은 첫 승리와 함께 자신감을 얻었고 이후 이순신이라는 최고의 지휘관을 필두로 연전연승의 기록을 세워 나갔습니다. 

 

 

1.옥포 해전 “명령 없이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침착하게 태산같이 무겁게 행동하라”
해전 장소: 옥포(경상남도 거제시)
교전 날짜: 1592년 5월 7일 (정오)
해전 경과: 이순신 장군은 적보다 열세인 아군의 전선 수가 많아 보이도록 어선까지 동원하여 첫 출전을 하였습니다. 일본군은 거제도의 옥포만 일대에 상륙하여 주변 지역을 약탈하고 있었는데 조선 함대는 항해 진형에서 전투 진형으로 전환하고, 좌우로 늘어서서 포구를 완전히 봉쇄한 전술을 펼쳤습니다. 당황한 일본군은 전선 6척으로 조선 함대와 맞섰습니다. 그러나 조선 함대는 우세한 화기와 궁시를 이용한 공격으로 일본군을 거침없이 격파하였습니다. 옥포 해전에서는 일본 전선 26척을 분멸하는 전과를 올리게 됩니다. 

 

2.사천 해전 “격전을 치른 끝에 일본 군선 12척을 모두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해전 장소: 사천 선창(경상남도 사천시)
교전 날짜: 1592년 5월 29일
해전 경과: 사천 포구의 뒤쪽은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높은 곳에서 조총을 발사할 수 있는 일본군이 더 유리한 상황이었습니다. 조선 수군의 화살은 일본군에게 미치지 못하였고 게다가 썰물이 되자 선체가 큰 조선 수군의 판옥선은 포구안으로 진입할 수 없는 아주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 물러설 수 없었던 조선 수군은 밀물로 바뀌는 틈을 이용하여 판옥선과 거북선을 포구 안으로 진입시킨 뒤,장전과 편전을 쏘고 피령전 등을 각종 총통으로 공격하여 격전을 치른 끝에 일본 군선 12척을 모두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3.당포 해전 “점차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일본 수군을 격파해 가는 작전을 펼쳤다”
해전 장소: 당포(경상남도 통영시)
교전 날짜: 1592년 6월 2일
해전 경과: 당포에서 일본군 약 300여 명 중 반은 성 내에서 분탕질을 하고 있었고, 나머지 반은 험한 지형에 의지하여 조총을 쏘면서 공격을 해왔습니다. 이곳에 있던 일본 함대는 대선 9척과 중소선 12척이었는데 조선 수군은 거북선으로 일본 군선을 격파하고 장군 휘하의 중위장이 일본 장수를 활을 쏘아 맞추고 머리를 베었습니다. 조선 수군은 이날 교전에서 일본 전선 21척을 분멸하였습니다. 

 

4.한산 대첩  “조선 함대는 일제히 선회하여 학익진을 형성하고 에워쌌다”
해전 장소: 견내량과 한산도 앞바다(경상남도 통영시)
교전 날짜: 1592년 7월 8일(오전)
해전 경과: 이순신 장군은 견내량 수로가 수심이 얕고 암초가 많아 대형 군선인 판옥선으로 해전을 치르기에는 부적합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또한 육지가 가까워 일본 수군이 상륙하여 약탈을 자행할 것을 염려하여 일본 함대를 넓은 바다로 유인하는 전술을 구사하게 됩니다. 먼저 전선 5~6척이 견내량의 좁은 수로에 들어가 일본 함대의 선봉과 전투를 벌인 뒤 그리고 거짓으로 패해 물러나는 척하니 일본 함대는 돛을 펴고 추격해 왔습니다. 일본 함대가 한산도 앞의 넓은 바다에 도달하자, 조선 함대는 일제히 선회하여 학익진(학이 날개를 편 모양의 진형)을 형성하고 일본 함대를 에워싸 그 사이 거북선 3척이 적진을 뚫고 현자 등 총통을 발사하면서 일본 함대의 전열을 무너뜨리고 총 공격을 퍼부어 마침내 일본군을 궤멸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한산 대첩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해전 금지’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해안에 성을 쌓고 지키도록 하는 등의 방식으로 일본군의 전략을 바꾸었다. 이후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과의 해전을 회피하는 전술로 일관하였습니다.  

 

5.부산포 해전 “참전 규모와 전과면서에 임진년 해전 중 가장 컸다”
해전 장소: 부산포(부산광역시)
교전 날짜: 1592년 9월1일(해 질 무렵)
해전 경과: 조선 함대는 초량목에서 적의 선봉으로 나온 대선 4척을 맞아 이를 모두 격파하고 장사진으로 돌진하면서 일본 진영을 본격적으로 공격하였습니다. 일본군은 산 위로 올라가 조선 함대를 향해 철환과 화살을 쏘면서 반격하였고, 조선 함대는 천자 그리고 지자총통과 불화살 등으로 공격을 계속하여 적선 470여 척 가운데 100여 척을 격파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의 핵심 장수인 녹도 만호 정운이 일본군이 쏜 철환에 머리를 맞아 전사하게 됩니다. 부산포 해전은 5배가 넘는 대규모 세력에 맞서 일본 수군의 근거지를 공격함으로써 평양까지 진출한 일본 육군의 퇴로를 위협한 의미 있는 일전이었습니다.  


6.명량 해전  “병법에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살 것이고, 살려고만 하면 죽을 것이다.’라고 하였고, ‘한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이 와도 두렵지 않다.’라고 했는데 이는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있으니 죽을힘을 다해 항거해 싸우면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비록 저의 전선은 적지만 보잘것없는 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해전 장소: 명량 수로(진도와 해남군의 화원반도 사이)
교전 날짜: 1597년 9월16일(오전 10시 전후~오후 3시)
해전 경과: 명량 해협을 침입한 일본 군선은 130여 척이었는데 명량 해협 밖에서 대기한 척 수까지 합하면 300여 척이었습니다. 좁은 수로를 통과하기 어려운 대형 군선 아다케부네는 해협 밖에 대기하고, 세키부네 위주로 협수로를 통과하여 조선 함대와 대결하였습니다. 당시 조선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크게 패하여 겨우 10여 척의 전선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선두에 서서 각종 함포와 화살을 쏘며 홀로 오랜 시간을 버티고 있었고, 이때 나머지 전선들은 겁을 먹고 뒤에서 주저하고 있어 이에 이순신 장군은 거제 현령 안위와 중군 김응함 등을 불러 군법을 시행하겠다고 하며 질책하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조선 수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조류가 바뀌자 뒤에서 주춤하던 조선 함대가 돌진하여 본격적으로 접전을 벌이게 됩니다. 강력한 반격으로 인해 31척의 군선을 잃은 일본군은 퇴각하였고 조선 수군은 승리의 깃발을 울렸습니다.

 

7.노량 해전 “지금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해전 장소: 노량해협/관음포(경남 남해군)
교전 날짜: 1598년 11월 19일
해전 경과: 일본 함대가 노량 수로를 통과해 올 것을 예측한 이순신 장군은 진린 함대를 노량 수로 좌측에, 조선 함대를 수로 우측인 관음포 위쪽 해상에 포진시켜 놓았습니다. 해전은 깜깜한 새벽녘에 일본 함대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됐습니다. 먼저 조선과 명나라 연합 함대의 화공 전술에 큰 타격을 입은 일본 함대는 전투를 계속하면서 퇴로를 찾아 관음포 쪽으로 이동하였습니다. 교전 당시에는 날이 밝지 않아 일본 함대가 관음 포구 안쪽까지 깊숙이 진입하였고, 날이 밝아 퇴로가 막힌 것을 알게 된 일본 함대의 일부 병력은 남해도로 상륙하여 도주하고, 나머지 함대는 퇴로를 찾아 죽기를 각오하고 해전에 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7년 해전 중 가장 치열한 근접전이 펼쳐지게 되었고, 화력 면에서 우세한 전력을 갖추고 있었고 일본군보다 먼저 노량 수로를 막고 유리한 위치에서 전투를 시작했던 조선과 명나라 연합 함대는 대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을 포함한 장수 10여 명과 명나라 부총병 등자룡 등 많은 장졸이 전사하였습니다. 

 


승리의 해전술 

이순신 장군은 전투력을 높이기 위해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병서에도 통달했던 이순신 장군은 해전에 임했을 때, 항상 전략적 사고로 형세를 살피고 전술을 구사하였다. 또한 군사들의 사기를 복돋아 정신력과 조직력을 강화했습니다.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조선 수군이 유리한 전쟁을 치룰 수 있도록 뛰어난 해전술을 펼쳤습니다. 전투력은 병력과 무기, 조직력의 조화에 의해 극대화 될 수 있으며 때와 장소에 의해서도 좌우가 되는데, 이순신 장군은 이것들에 능통하였습니다. 

 

 

신뢰받는 지휘관 

 

 이순신 장군은 통제영 지휘소인 운주당에서 휘하 장졸들과 작전 회의를 할 때도 그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회의에 참여시켰습니다. 또한 전투에서 공을 세운 부하들에게는 상을 주고 <장계>에도 상세히 기록하여 왕에게 보고하였습니다.  

 

 

 

 


 

조선 -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은 조선,명 그리고 일본 3국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습니다. 특히 전쟁터였던 조선은 국토가 황폐해졌음은 물론이고 전쟁이 끝난 지 50여 년이 지난 후까지 국가의 호적 대장에서 파악된 인구수는 전쟁 이전의 3분의 1 수준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조선에서는 정치, 경제, 문화 그리고 사회 등 각 방면에 걸쳐 적지 않은 변화가 나타나게 됩니다. 

 

명나라 - 명나라는 조선 다음으로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20만여 명의 지원군을 파견하면서 막대한 전쟁 비용을 지출한 결과 국가 재정이 어려워졌습니다. 만주의 여진족은 조선과 명이 전란에 휩쓸린 틈을 타고 급속히 세력을 키웠습니다. 마침내 명나라는 여진족에 의해 멸망하고 여진족은 중국 최후의 통일 왕조인 청나라를 건국하였습니다. 

 

일본 -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막부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조선으로부터 들여온 금속활자의 영향으로 인쇄술이 크게 발달하였고, 포로로 잡아간 도공을 중심으로 도자기의 제작 기술이 급격히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4D 체험관이 있어 여러 해전사를 현실감있게 감상할 수 있다 

 

 

 

거북선 조립 체험 그리고 수군 무기 체험 등 다양한 체험을 해볼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 추억 속 영웅인 이순신 장군과 그의 업적을 만나봤습니다. 우리가 알던 그대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명장입니다. 임진왜란은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역사상 참혹한 사건 중의 하나이고, 투철한 조국애와 뛰어난 지략과 전략으로 위태로운 나라를 구한 장군 이순신. 그는 수많은 시련을 묵묵히 극복하면서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크고 작은 해전에서 단 한번도 패한 적이 없던 이순신 장군의 불멸의 기록은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것이고, 우리 그리고 후손까지에게도 길이 남을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 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를 위해 힘쓰고 목숨을 바친 분들의 희생을 결코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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