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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나 꿈과 희망을 지켜준 그들의 아픔

작성일2013.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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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기자단

 

 

 

위에 사진은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음을 여러분들은 느끼셨나요 자, 10초 동안 가슴속에 울리는 무언의 소리를 듣기를 바랍니다. 하나, 둘, 셋… 열! 과연 소녀는 무슨생각을 하며 저 동상들을 바라봤을까요 “저게 무슨 동상이지” 혹은 “크고 무섭다.” 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훗날 저 소녀는 저 동상속에 숨겨진 의미들을 알게될거고 역사를 배우게 될 것 입니다. 우리나라의 아픈과거와 지금의 희망을 안겨준 사람들을 배우고 잊지 않는다는 것. 이것 만큼 참된교육이 또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누구나 용기가 있기 마련이지만 누구나 두려움도 가지고 있을겁니다. 그 두려움을 이기고 우리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지금의 우리를 만들어 주신 우리 조상들의 한이 맺힌 전쟁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전쟁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 아니 상상 이상의 지옥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겠지만 그 지옥을 이겨내지 않으면 우리 혼이 담긴 나라가 사라진다 생각하면 또 가슴속이 뜨거워만 집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꿈과 희망을 만들어 준, 위대한 위인들과 조상들에 대해서 ‘우리는 여전히 감사함을 잊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가’ 에 대해서 다시 한번 자문해봐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가 쥐고 있는 행복과 꿈, 그 바탕이 되어준 그들의 전쟁 이야기이자 우리 이야기를 다시 한번 들어가보려고 합니다.

 

사진촬영/신승용


평일 아침에 방문한 전쟁기념관은 생각만큼 한산하지는 않았습니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서 교육차원에서 방문한 모습이 여기저기 눈에 띄였고, 저와 같은 무리도 꽤 있음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대한민국은 여전히 진행형이었습니다.

 

 

 

625와 관련된 전시를 맡고 있는 2층(위)과 3층(아래)의 구조 

 

이 큰 전쟁기념관에 무려 2층을 차지하고 있는625관련 정보들이 말해주듯이, 우리가 알아야 할 것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충분히 뜻하는 것 같습니다. 

 

 

 

 

 

 

사진촬영/신승용 

 


“애국충정과 민족적 결속, 그들과 마음속으로 소통하다.”


분명 우리 민족은 외세의 끊임없는 도발과 침략에 맞서 강인한 정신으로 나라를 지키고 현재의 대한민국으로 발전 시킬 수 있었다는 것에 의문점을 가지는 사람은 없을겁니다. 호국정신은 삼국시대로부터 고려, 조선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쟁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원동력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호국추모실은 호국영령으로 산화한 선열들의 정신과 충절의 의미를 되새기고 추모하는 전당입니다. 전쟁기념관에 들어가면 맨 처음 눈에 띄는 곳이기도 하는데, 전쟁기념관 곳곳의 발걸음을 아주 무겁게 해주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럼 내부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사진촬영/신승용


들어가자마자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전사자명부입니다. 양옆에 촛불과 앞에 ‘나라를 위해 몸 바친 호국영령의 고귀한 희생을 추모합니다.’라고 써있는 비석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나 자신도 모르게 숙연해지는 조그만한 장소였습니다. 전사자 명단을 둘러보니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이름도 있지만 대부분 익숙하지 않은 옛날 이름이였고, 왠지 모를 가슴 아픔이 뼈끝에서부터 전해져오고 있었습니다.
 

 

사진촬영/신승용 

 

전사자명단이 있는 조그만한 방을 지나자 더 큰 방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위에 사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천장에서 내리는 파란불빛이 밑에 물이 가득한 큰 항아리에까지 내리면서 알 수 없는 오묘함과 분위기를 내고 있었습니다.

 

 

사진촬영/신승용

 

 

 

 

 

호국추모실에서 충분히 마음을 정리하고 전쟁기념관을 관람할 준비를 마치고 곧바로625관련 관람실로 향했습니다. 제일 먼저 봐야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625전쟁의 시작이였습니다.  

 

 

사진촬영/신승용 

 

“준비한 자와 준비하지 못한 자의 전쟁의 시작, 625”


구소련 비밀외교문서에 의하면 남침 1년 6개월 전인 1948년 말부터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남침 의사를 제기했고, 이미 소련도 병력을 북한에 잔류시키며 전쟁준비를 지원했습니다. 거기다 모택동 또한 전쟁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지침, 미군과 일본군의 참전 가능성 문제 등에 관하여 토의하며625전쟁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습니다. 이들의 말을 인용하면, ‘남한이 조국전선의 평화제의 거부하고 있으므로 무력침공을 할 수밖에 없다’라고 주장하면서 초기 목표인 ‘북한 지도부가 남한의 민중봉기 등을 통하여 전 한반도를 사회주의화 한다’를 실현시키기위해 결국625전쟁은 시작됩니다.

사진촬영/신승용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625전쟁 직전 남북한의 전력은 아주 현격하게 차이가 있었습니다. 특히나 당시 국군의 방어 준비태세 면에서 완벽한 취약점과 위협이 되었습니다.  하나의 일례로, 당시 국군 제7사단의 경우 사단 전방 북한군 병력보다 무려 7분의 1 수준이였다고 하니 엄청난 격차가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거기다가 국군은 적의 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대전차화기나 항공기를 공격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였는데, 북한군은 소련제 T-34전차를 242대나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북한군의 무기 장비는 대부분이 소련으로부터 도입된 신형장비이고 예비량까지 확보되었지만, 국군이 보유한 무기들은 미군으로부터 받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되던 노후장비들이였습니다.  

 

<전쟁 직전 국군의 상황>

 


게릴라 소탕작전으로 인한 전력 분산


대규모 군사훈련 부족


6월24일 비상경계령 해제와 대규모 휴가


주요 지휘관들의 육군회관 개관 축하연 참석

 

사진촬영/신승용  국군 무기(좌), 북한군 무기(우) 

 

이러한 불리한 상황을 안고 북한군의 기습남침이 시작되었고, 38선으로부터 40km 남쪽에 위치한 서울은 집중적인 공격을 당하게 됩니다. 단 한대의 전차와 자주포를 가지고 있지 않던 국군에게 T-34전차는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전의를 상실하는 병사도 있었고, 도망가는 병사도 있었지만 화염병과 포탄을 들고 직접 육탄으로 전차를 향해 돌격한 용감한 국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6월 26일에 의정부가 하루만에 북한군에게 점령당하고, 28일 아침부터 서울은 북한군의 손에 넘어가게 되는 비극이 일어나고 맙니다.

 

사진촬영/신승용 북한군의 T-34 전차

 

 

 

 

사진촬영/신승용 

 

“손 꼭 붙잡아라, 여기서 잃어버리면 영영 잃어버리는 것이여”


단 하루전만해도 내일의 일거리를 걱정하던 국민들은 이제 당장 오늘의 목숨을 생각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무척이나 겁에 질린 피난민들은 우왕좌왕 하기 바빴고, 집에 있던 모든 짐들을 챙기고 남쪽으로 남쪽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합니다.  


 


 

 

사진촬영/신승용


노인과 부녀자 그리고 어린아이 등 모든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었던625전쟁. 피난민들은 비바람과 추위를 피하기 위해서 판자, 깡통, 가마니, 볏 짚으로 대충 집을 짓고, 시레기 죽, 꿀꿀이 죽 등으로 하루 끼니를 때우곤 했습니다. 사진(우, 아래)을 보면, 어린아이들은 미군병사가 주는 초콜릿을 얻어 먹기 위해 몰려 들었고, 구호단체나 배급소에는 사람들로 긴 행렬을 이루었습니다.

  

 

사진촬영/신승용


전쟁기간 중에도 우리 국민들의 교육에 대한 열기는 식을 줄 몰랐습니다. 전쟁기간 중에도 자녀의 교육을 위해서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래도 좋다는 부모들이 많았고, 자녀들 스스로도 교육을 통해 빈곤으로부터 탈피하려는 의지가 높았습니다. 이와같은 국민적인 교육열은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과정에서 중요하고 커다란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사진촬영/신승용 그 당시 사용된 교과서

 

 

 

 

 

사진촬영/신승용 

 


“첫째, 한국에서의 공산 침략을 방관하지 않겠다. 둘째, 한국 정부를 탄생시킨 유엔을 통해 대처하겠다.”
 

 

 

북한군의 남침을 받은 한국 정부는 즉시 이 사실을 유엔한국임시위원단과 주한 미 대사관에 통보하면서 북한의 남침행위를 즉각 중지시켜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유엔은 곧바로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고 미국이 제출한 ‘북한군의 침량 주지 및 38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지만 북한은 그 결의안을 무시하고 침량 행위를 지속하였습니다.

 

사진촬영/신승용 

 

6.26결의에 따라 미국의 군대가 본격적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되면서 32개국 또한 유엔의 결의를 지지했습니다. 이 지지로 인하여 7월 중순에는 지지국가가 52개국으로 증가하게 됩니다. 그 후 위기에 처한 한국을 돕기 위해 16개국이 전투부대의 파병을 했으며, 5개국이 의료를 비롯하여 시설을 지원했습니다.
 

 

사진촬영/신승용    가장 많은 병사를 파병한 미군(좌), 영국군(우)

 

 

 

 

사진촬영/신승용

 

 

 

 

 

사진촬영/신승용 

 

“우린 이 작전으로 적의 공격능력 및 저항능력마저 상실시켰다”

 

625전쟁에서 인천상륙작전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을만큼 인천상륙작전은 실로 성공할 확률이 적었던 작전이였습니다. 미 합참은 8월 28일에 인천상륙작전 계획을 공식 승인하고 이에 따라 맥아더 장군은 8월30일에 인천상륙작전 명령을 하달하였으며, 9월 6일 상륙작전 날짜를 최종 9월15일로 확정하였습니다. 적을 일거에 포위 격멸할 목표에 시작된 인천상륙작전은 단행되었고 대반격작전을 전개함으로써625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맥아더 장군은, 북한국이 3개월 동안에 얻은 승리를 15일만에 뒤집는 대 역전극을 펼치는 명장 다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 탈환의 길을 열었을 뿐 아니라, 낙동강 방어선에 투입된 북한군 주력 부대의 병참선을 일시에 끊고 공세를 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진출처/625전쟁60주년사업위원회

 

 

 

사진촬영/신승용 

 


‘장진호 전투’ 영하30도의 추위 그리고 공포와 싸우다


미 제 10군단 예하의 미 제1해병사단은 북한의 임시 수도인 강계를 점령하기 위해 장진호 북쪽으로 진격하던 중, 중공군 제9병단 소속의 7개 사단이 형성한 포위망에 막혀 진출이 저지되게 됩니다. 이후 방향을 바꾸어 해안방면으로 철수하면서 후방으로의 공격작전을 실시하게 됩니다. 미 제1해병사단은 영하 30도가 넘는 추위와 폭설 속에서 2주간에 걸쳐 유담리에서 신흥리에 이르는 40km가 넘는 협곡지대를 빠져나오며 철수에 성공하였습니다.
 


사진촬영/신승용 국군의 전투 모습

 

사진촬영/신승용

 

“나라의 심장인 수도, 3일만에 되찾는 감격을 맛보다” 

 

인천상륙작전으로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성공한 국군과 유엔군은 9월18일부터 서울을 향한 진격을 시작합니다. 그러자 북한군은 2만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 서울을 방어하려 하면서 서울 서측방과 남측방에서 격렬한 전투가 전개됩니다. 9월 26일까지 서울 시가지의 절반 정도를 점령한 뒤, 다음날인 27일에 잔적을 섬멸하고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했습니다. 그 날은 인천상륙 후 2주일 뒤, 북한군에게 피탈당한 지 3개월 만이였습니다. 수도 서울의 탈환은 우리 국민에게 그리고 현 후손들에게 감격적인 사건이 아닐수 없습니다. 이 전투로 인하여 국군과 유엔군은 약 4천여 명의 병력 손실을 입었으나, 북한군은 1만4천 여 명이 사살되었습니다.

 

 

사진촬영/신승용 ‘한 치의 땅도 양보할 수 없다!’ 고지쟁탈전


고지쟁탈전은 영화 ‘고지전’으로부터 널리 알려진 전투입니다. 북한군은 휴전회담을 이용하여 진지보강과 전력 증강을 꾀하면서 전쟁에서 달성하지 못한 군사목표를 이루려고 했기 때문에 이해관계가 대립하여, 회담이 결렬되는 사태가 자주 일어났습니다. 결국 휴전회담장에서 말로 싸우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 전선에서 휴전 후 방어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한 고지쟁탈전이 전개되기에 이르게됐던 것입니다.




사진촬영/신승용 우리가 알고있는 전투외에도 수많은 전투가 있었습니다.  

 

 

 

사진촬영/신승용

 

 

 

 

 

 

 

 

사진촬영/신승용

 

“끝나지 않은 전쟁,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전쟁”

 

전쟁 후 대한민국의 인명피해와 재산상의 손실은 막대하였습니다. 인명피해는 사상자가 약 150만 명에 달했고, 20만 명의 행방불명과, 25만 명의 부상자를 냈으며 10만 명 이상의 주요 인사가 납북되었습니다. 재산상 총 피해액은 약 18~30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며, 대한민국은 공업시설 42%, 발전시설 41%, 탄광시설 50%, 주택의 3분의 1이 파괴되는 등 전 국토가 초토화되는 비극을 맞이했습니다.

 

 

사진촬영/신승용


북한은 여전히 ‘남조선혁명과 한반도의 공산통일’이라는 대한민국에 대한 적화전략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수십 만여 건에 이르는 정전협정 위반사항들과 무장공비 침투, 대통령 암살기도, 민간항공기 테러 등 전쟁에 버금가는 각종 도발은 전 세계를 경악케 했습니다. 625전쟁은 대한민국과 국민 모두에게 북한 공산주의 실체를 여실히 보여주는 시대의 아픔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때 우리 조상들이 겪었던 그 비극적인 전쟁의 고통을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서는 안 될 것이며,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전쟁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진촬영/신승용

“아픔과 고통이 있었어도, 우리는 희망이 있고 그걸 이야기 하고 싶다.” 

 

여전히 우리나라는 휴전 중인 나라이지만, 아팠던만큼 성숙해졌습니다. 현재 이 순간에도 국가의 부름을 받고 힘껏 달려가는 젊은 남자들이 군복을 입고 땀을 흘리고 있으며, 제대 후에도 예비군 훈련을 통해 국가방어태세 준비를 늦추지 않고 있습니다. 625전쟁 후, 대한민국은 급성장해 세계적인 강국이 되었고 더불어 스포츠 강국까지 되며 세계에 나라의 위상을 널리 떨치고 있습니다. 625전쟁 후에 잃었던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 붙잡고, 일어났던 우리 조상들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재 전쟁기념관에는 여전히 유치원생과 초등학생 등 어린친구들이 국가의 아픈 과거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역사교육이 곧 우리나라의 깨끗한 뿌리가 될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꿈과 희망, 다 우리 조상들의 고통과 바꾼 선물이라 생각하고 오늘 하루만큼만 그들의 넋을 위해 묵념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사진촬영/신승용  진지한 태도로625전쟁에 대해 교육받고 있는 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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