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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에서 서울까지 <청량리 展>

작성일2013.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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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기자단

                                                                                                             ▲청계천문화관 특별전 '청량리' 포스터 (사진=김미영)



(수목이 울창하고 남서쪽이 트여 언제나 서늘하고 상쾌한 느낌을 준다하여 '청량'이란 이름이 붙여진 청량리는 우리나라 최초의 가로수길이 조성된 곳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청량리의 근대적 등장은 그러했다. 한양도성 밖 한적한 가로수길은 오래된 흑백영화처럼 낭만과 유희의 상징이었다. 한오백년 조용하던 청량리에 19세기 말, 명성황후를 향한 애틋한 사부곡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전차가 놓이고,  일제강점기. 경원선/중앙선/경춘선 기차가 청량리에 사람과 물건을 실어 나르면서 청량리는 사람의 터전으로서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하략> ('청량리 展' 홍보책자 인용)

 청계천 문화관에서 4월 25일부터 7월 21일까지 약 세달간 전시되는 특별전 <청량리>는  구한말부터 오늘날까지 사람과 함께 발전한 청량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소장 유물, 사진, 영상자료 200여점을 두고  청량리의 변천사를 기억하기 위해 청계천 문화관과 서울학연구소가 공동 조사한 내용으로 마련되었다.



 청량리 일대는 원래 흥인지문 밖 동쪽 외곽지역이라는 뜻의 '동교'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동교는 1895년 명성황후가 경복궁에서  죽음을 맞은 뒤 발인을 위해 홍릉으로 지나가는 여정의 길이기도 했다. 그 후 1897년, 상심한 고종의 모습을 본 미국인 콜브란이 고종에게
전차 건설을  제안하면서 1899년 8월,  '서대문-종로-동대문-청량리'의 단일 노선을 가진 한반도 최초의 열차 '청량리선'이 개통되었고
그 후에도  1914년 경원선, 1936년 중앙선, 경춘선이 연이어 부설되면서 청량리는 경성 동북부 교통의 집결지로 자리잡았다.

 1974년. 또 다시 청량리를 중심으로 교통 혁명이 일어난다. '서울역-종로-청량리'에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었기 때문이다.  한반도 최초의 열차 청량리선이 개통된지 75년만에 일어난 일이다.  지하철 1호선을 중심으로 청량리는 하루 3만여 명이 넘는  인구가 모이는 상업의 메카가 되었다.



현재의 청량리는 아늑한 시민들의 보금자리가 되었지만, 그 전엔 뼈 아픈 거주의 기록이 남아있다. 현재도 청량리는 '집장촌'의  대표 지역으로 꼽히고 있는데 그 시작에는 1876년 맺어진 강화도 조약이 있다. 조약 이후 일본군이 한국에 들어오면서 철도역 부근에  집장촌이 형성된 것이다. 이 후, 20세기 초부터 경성부가 급격히 도시화되면서 경성 외곽인 청량리에는 철도관사, 공영주택, 시민아파트 등  근대적 도시주거지가 형성되었다. 단순히 거주지만 형성된 것이 아니라 지방의 농/임산물을 판매하는 큰 시장이 함께 형성되면서  청량리는 지방 이주민들에게도 새로운 보금자리가 되었다.

[1930년대]  토막집(흙집) →  [한국전쟁이후]  부흥주택(판자집)  [1970년대 이후]  미주아파트


경동시장/청과물 도매시장/ 서울약령시 역시 청량리 역사의 산물이다. 경동시장은 생산지와 밀착하여 대량소비처, 일반 소비자에게  물건을 전달하는 산지친화형 도/소매 유통기능을 담당하고 있으며 청량리 청과물 도매시장 역시 서울의 마지막 남은  청과물 도매시장으로, 전국의 생산지에서 공수한 싱싱한 상품을 거래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서울약령시는 조선시대 때부터 보제원이 있던 자리로, 현재까지도 다양한 한약재를 도/소매의 형태로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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