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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의 아버지, 백범 김구

작성일2014.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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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기자단

 

 요즘 젊은 층 들은 여러 가지 의미 없는 기념일들을 챙기느라 여념이 없다. 하지만 정작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인생을 바쳐 싸우신 분들을 기념하는 삼일절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이 현실이다.  삼일절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져다 주는지 특히 '백범 김구' 선생님의 일대기를 통해 그 당시 상황과 독립운동의 과정을 되돌아보며 나라사랑에 대해 생각해보고 그 분들을 기리는 시간을 갖도록 하자.

 

 

 


삼일절은1919년 3월 1일, 한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한국의 독립 의사를 세계 만방에 알린 날을 기념하는 날. 3.1운동은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여 전 민족이 일어난 항일독립운동으로 일제 강점기에 나타난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이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승국의 식민지에서 최초로 일어난 대규모 독립운동이기도 하다. 3.1절을 맞이하여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컸었던 독립만세운동, 의미하는 바가 많은 3.1운동에 대해 알고싶었으며, 그 중에서도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아버지라고 불러도 부족함이 없는 백범 김구 선생님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 ‘백범 김구 기념관’에 찾아갔다.

 

 

 

    ▲ '백범 김구 기념관' 입구에 크게 자리하고 있는 김구 선생님의 동상. <사진=김희은 기자>

 

효창공원 근처에 위치한 '백범 김구 기념관'은 조국을 위해 일생을 바친 겨레의 큰 스승 백범 김구선생님의 삶과 사상을 알리고 발전시키기 위해 2002년에 개관하였다. 이 곳 전시관은 '백범 김구'선생님의 유년기 시절부터 동학, 의병활동 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 한국 광복군 그리고 서거하시기까지의 일대기를 쭉 나열해 놓은 공간으로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마련한다. 그렇다면 김구 선생님은 과연 어떤 일을 하셨고 어떤 분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사진 출처: 네이버 이미지

 

백범 김구 선생님은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자주 평화통일에 모두 바친 민족의 지도자이며 겨레의 큰 스승이다. 1876년 황해도에서 가난한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난 김구 선생님께서는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의병활동과 신교육 운동 등 조국을 위해 많은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1907년, 국권회복 운동의 국내 최대 비밀조직이었던 신민회에 가입하여 항해도 총감으로 활동하다가 옥 생활도 하였으나 이에 멈추지 않고 농민계몽운동을 전개하는 등 일생을 나라를 위해 바치셨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김구 선생님은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며 당시 어려운 상황에서도 임시정부를 지키며 활성화에 전력하셨다. 이어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선생님은 한인청년들을 교육시키며 다가올 독립전쟁에 대비하는 일에도 총력을 다하셨다.

 

1940년, 충칭에 정착한 김구 선생님은 임시정부 주석으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여 군사활동을 전개하였으며,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을 이루었고, 연합국으로 부터 전후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는 등 항일운동의 최선봉에서 조국독립을 위해 투쟁하였다. 그리고 그 후, 김구 선생님은 민족통일을 위한 노력을 쉼없이 전개하던 중 1949년 6월 26일 통일운동을 저해하려던 천일, 반통일 세력에 의해 '경교장'에서 서거 하셨다.

 

마침 최근, 김구 선생님께서 광복 후 잠시 머무르시고, 서거하셨던 '경교장'이 개방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김구 선생님의 발자취를 따라 '경교장'을 찾아가 보았다.

 

-참조 : '백범 김구 기념관'.

 

 

 

▲ 최근 복원되어 개방된 서대문구에 위치한 '경교장'의 전경. <사진= 김희은 기자>

 

백범 김구 선생님이 1945년 11월 중국에서 환국한 이래 생애를 마칠 때까지 생활하던 사저인 이곳은 서대문구에 위치한  '경교장'이다. '경교장'은 원래 1938년, 금광업을 하던 최창학의 양옥 주택이었다. '경교장'이라는 이름은 이곳이 광복 후 백범 김구 선생님의 거처로 쓰이면서 근처 개울에 있는 경교라는 다리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경교장'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및 김구 선생님 등 임시정부 요인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그렇게 백범 김구 선생님께서는 광복 후 약 3년 7개월간 이곳에 머물면서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 하시다가 1949년 6월 26일 이곳에서 저격을 받아 서거하셨다.  백범 선생님의 서거 후 이곳은 많은 것을 거쳐 고려병원으로 사용 되던 중 대대적인 수리를 거쳐 현재, 2층의 침실 부분을 복원하여 백범 기념실로 사용하며 그 날 총탄의 자국은 아직까지 창문의 유리에 박혀있다. 이 ‘경교장’의 위치는 서대문 역4번 출구로 나와 쭉 가다가 강북삼성병원 우측에서 꺾어 들어가면 바로 자리잡고 있다. ‘경교장’은 복원작업을 마치고 2013년 3월부터 시민들에게 무료 개방하고 있는 상태이다.

 

'경교장'은 총 지하, 1층, 2층으로 마련되어 있었으며 1층은 응접실, 귀빈 식당 등 회의를 하는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2층은 김구 선생님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원들의 숙소 및 개인 공간으로 되어있었다. 지하는 본디 사용했던 용도가 아닌 당시 사용했던 물품들을 전시해 놓은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럼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경교장'에서는 무슨일이 있었는지 살펴보도록하자.

 

 

 

 ▲왼쪽부터 1층에 위치한 응접실의 모습. ▲귀빈식당으로 1945년 12월 2일 임시정부의 공식 만찬이 개최되고, 김구 선생님께서 서거당시 빈소로 사용된 곳.<사진=김희은 기자>

 

 경교장’ 입구에 들어서자 마자 느껴지는 차분한 공기는 마치 그 당시로 돌아간 듯 생생하게 전해졌고, 엄숙한 분위기는 좌중을 압도했다. 현재 ‘경교장’은 연세가 많은 자원봉사자 분들께서 안내를 맡고 계셨고, 그 분들은 아무런 대가 없이 나라를 사랑하는 그 마음 하나로 자리를 지켰다. 그 중 한 분은 젊은이들을 마주칠 때 마다 조국의 평화를 위해서는 젊은이들 한명, 한명이 힘을 길러야 된다는 말씀을 계속해서 강조하셨다.

 이 곳 ‘경교장’은 김구 선생님뿐 아니라 많은 독립운동가 분들의 업적과 일제강점기 이후의 역사와 관련된 전시품들을 보존하고 있다. 1층에는 임시정부가 활동했던 여러 가지 공간으로 언급한 바와 같이 응접실 또는 회의실이 주를 이루었다. 다음으로 2층을 올라가 보았다.

 

 


▲왼쪽부터 김구 선생님께서 쓰시던 방. ▲2층에 있는 응접실 (서재). ▲ 김구 선생님께서 서거하실 당시의 장소로 창문에는 그 때의 총알이 박혀있다. <사진=김희은 기자>

 

 2층은 임시정부 요원들이 생활하던 숙소와 김구 선생님의 집무실이 복원되어 있었다. 복원된 집무실의 창문은 김구 선생님이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서거하실 당시의 상황을 우리들이 느낄 수 있도록 흉탄의 흔적을 재현해 놨다. 집무실의 책상을 보고 있자니 이 나라의 국민으로써 나도 모르게 가슴이 찡해져 왔다. 빛이 내리쬐는 그의 빈자리가 무척이나 쓸쓸해 보인다.

 

 

 

 

▲ 왼쪽부터 차례로 김구 선생님을 포함한 당시 독립을 위해 싸우신 분들의 모습. ▲ 김구 선생님의 '도왜실기'와 당시 사용하시던 시계의 모습.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현재 지하는 전시실로 사용하고 있으며 오른쪽과 같이 복원 과정이나 임시 정부의 역사를 전시하고 있다. <사진=김희은 기자>

 

한편, 계단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지하실이 보이게 된다. 지하실은 임시정부 당시에 보일러실과 부엌 등으로 사용되었지만, 지금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전시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1층과 2층에 복원되어 있는 현 모습과 과거의 모습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으며 당시, 김구 선생님 및 임시정부요원들의 흔적과 자취를 전시해 놓은 이곳은 살아있는 역사이자 기록이다.

 

 

 

▲ '경교장'을 나오며 입구에 있는 방명록에 글쓴이가 남긴 글. <사진=김희은 기자>

 

‘경교장’을 나오는 내내 김구선생님의 애국심과 그 당시 같이 활동했던 여러 독립운동가 분들의 열정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단지 삼일절을 기념하여 방문한 ‘경교장’을 넘어, 많은 것을 보고, 느꼈던 오늘은 정말이지 뜻 깊고 나라 사랑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며 반성하는 시간이었다. 현재 우리나라를 지킬 수 있었던 힘은 바로 그 분들의 위대한 애국심과 목숨 바쳐 지키신 열정 덕분이다. 따라서 현재 우리가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작은 것, 바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반드시 가지고 지금부터라도 나라를 위해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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