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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로이트 르포 : 새로운 발견, 살아있는 도시 디트로이트

작성일 2018.02.21

영현대 기자단이 미국으로 떠난 해외 취재! 여러 도시를 방문해 취재를 진행하며, 마지막으로 도착한 도시는 디트로이트였다. 신형 벨로스터가 공개되는 2018 디트로이트 모터쇼 현장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시카고에서 차로 4시간 정도 달리니 디트로이트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터쇼가 열리는 디트로이트 코보 센터에 내려 처음 디트로이트 도시에 발을 디뎠다. 발을 딛자마자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춥다’는 것이었다.

▲ 한적한 디트로이트의 도로
▲ 한적한 디트로이트의 도로

디트로이트는 미국 동북부에 위치한 미시간주의 최대 도시로 디트로이트 강을 사이에 두고 캐나다와 국경을 마주한 곳이다. 캐나다와 가까운 만큼 우리나라보다는 날씨가 추운 편인데 한여름인 7, 8월에도 기온이 28도 정도에 머문다. 하지만 디트로이트가 춥게 느껴지는 이유는 단순히 온도 때문은 아니었다. 디트로이트로 오기 전 방문했던 화려한 불빛의 라스베이거스나, 하늘을 찌르는 고층 빌딩이 가득한 시카고와는 다른, 디트로이트만의 삭막한 분위기가 우리를 더욱 춥게 느껴지도록 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디트로이트가 이토록 쓸쓸하고 적막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1900년대 디트로이트는 미국을 대표하는 가장 큰 도시 중 하나로, 미국의 자동차 산업을 책임지는 ‘자동차 도시’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이자, 인구의 1/3가량이 빈곤층에 속하는 가난한 도시이기도 하다. 과연 무엇이 디트로이트라는 도시를 이토록 황폐하게 만든 걸까? 소위 디트로이트를 말할 때 ‘죽은 도시’라고 비유하는데, 정말로 디트로이트에는 생생함을 찾아보기 힘든 것일까?

디트로이트, 자동차의 도시가 되기까지


1805년부터 약 40년간 디트로이트는 미시간주를 대표하는 도시였다. 180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디트로이트는 미국 최대의 공업 도시로 성장하게 되는데, 그 원동력은 디트로이트의 좋은 입지조건에 있다. 수상교통이 중요한 운송 수단이었던 18세기와 19세기, 미국의 5대호(슈피리어, 미시간, 휴런, 이리, 온타리오)로 둘러싸인 디트로이트는 공업이 발달하기 가장 좋은 도시였다.

▲ 포드 자동차의 역사와 미국 산업사를 볼 수 있는 포드 박물관
▲ 포드 자동차의 역사와 미국 산업사를 볼 수 있는 포드 박물관

1920년대에 들어서며 포드의 설립자인 헨리 포드는 디트로이트 디어본에 리버 루지 공장을 설립한다. 이 공장은 헨리 포드에게 '자동차 왕'이라는 칭호를 가져다줬을 뿐만 아니라, 디트로이트가 자동차의 도시로 성장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당시 리버 루지 공장에는 약 9만 명의 노동자가 일했고 하루 7,500대의 차량을 생산했다. 세계 어디에도 없는 대량 생산을 해내는 대규모의 공장이었다.

▲ 디트로이트의 현재 풍경
▲ 디트로이트의 현재 풍경

포드와 함께 GM(General Motors), 크라이슬러 등 다른 자동차 회사들도 디트로이트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자동차 회사와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높은 임금을 받았다. 노동자들은 집을 짓고 차를 사며 부유한 삶을 누렸고, 자동차 회사를 경영하는 임원이나 변호사, 의사 등 백인 상류층의 수도 늘어갔다. 디트로이트의 세수도 따라서 늘어나고 이를 통해 새로운 도로와 다리, 극장이나 호텔 등이 세워졌다.

▲ 디트로이트의 도심 풍경
▲ 디트로이트의 도심 풍경

미국을 대표하는 3대 자동차 제조사인 포드와 GM, 크라이슬러는 아직도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이 세 회사를 키운 도시는 그렇지 못했다. 1950년대 부흥의 절정을 찍은 디트로이트는 회복하기 힘든 하락의 길을 걷게 된다.

디트로이트, 화려했던 도시가 몰락하기까지


디트로이트가 발전하던 1900년대 중반까지 많은 흑인 노동자들이 디트로이트 도시 중심으로 유입됐고, 기존의 상류층 백인들은 도시 외곽으로 거주지를 옮겨간다. 이런 상류층 백인들은 도시 중심의 가난하고 궁핍한 삶을 사는 흑인 노동자들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의 현실은 1950년대를 넘어서며 달라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디트로이트의 1월
▲ 디트로이트의 1월

백인 상류층을 따라 자동차 회사와 공장들은 도시 외곽으로 옮겨갔고, 도시 중심에 남겨진 흑인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게다가 당시 흑인에게는 은행 대출이 제한되는 등 인종차별 또한 여전히 심한 상태였다. 그리고 흑인들의 분노는 1967년 ‘디트로이트 폭동’으로 표출된다. 백인 경찰이 무허가 술집을 단속해 흑인 80명을 체포한 것인 폭동의 불씨를 지폈다.

폭동은 7월 23일에 시작돼 시카고부터 뉴욕과 샌프란시스코까지 23개 도시로 퍼져 나가며 대규모 폭동이 되었다. 당시 존슨 미국 대통령은 디트로이트에 약 4천 명의 공수부대를 파견하고서야 폭동을 진압할 수 있었는데, 5일간 있었던 이 폭동에서 43명이 죽고 467명이 다쳤다. 어떤 상황에서도 폭력은 정당화되기 힘들지만, 폭동으로 번지게 한 원인에 대해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그 원인이 현재까지 이어져 지금의 디트로이트를 만들었을 것이다.

폭동을 본 백인들은 디트로이트를 떠나기 시작한다. 도시는 점점 비어 갔고 공장들은 문을 닫았다. 여기에 자동차 생산의 기계화가 본격화되면서 노동자들이 일할 곳은 더욱 사라져갔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포드 루지 공장의 노동자 수가 약 6,000명으로 줄어들게 되는데, 이는 1930년대 공장을 지을 당시 노동자 수의 10분의 1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1970년대 텅 빈 도시는 마약 판매 조직이나 갱 등 범죄자들이 채워졌다. 또한, 저렴하고 연비 좋은 일본 자동차가 인기를 끌며 미국 3대 자동차 제조사라는 포드와 GM, 크라이슬러 또한 위기를 겪게 된다. 결국, 자동차로 흥했던 디트로이트는 나오기 힘든 쇠퇴의 늪으로 빠지게 된다.

디트로이트, 다시 살아나기까지


디트로이트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점은 도시 전체에 버려진 빈 건물과 집이 많다는 것이다. 중심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보이는 건물 대부분이 비어있거나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실제로 디트로이트에 버려진 상가나 빌딩, 집은 약 8만 채가 넘는다. 모두 디트로이트의 쇠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디트로이트는 여전히 춥고 삭막한 도시였다.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도 길을 걷는 사람을 보기 힘들었고, 빈집과 빈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이 도시에서 열리는 디트로이트 모터쇼가 세계 3대 모터쇼 중 하나로 꼽히며, 세계 많은 사람이 여전히 디트로이트를 방문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영현대 기자단 또한 2018 디트로이트 모터쇼를 방문해 자동차를 향한 그 열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디트로이트는 여전히 자동차의 도시라는 상징을 지녔으며, 앞으로 더욱 다시 살아날 디트로이트를 기대해볼 수도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 2018 디트로이트 모터쇼가 열렸던 코보(COBO) 센터
▲ 2018 디트로이트 모터쇼가 열렸던 코보(COBO) 센터

디트로이트시는 2013년 7월 파산 신청을 하고 기존의 버려진 도시를 재구축하고 ‘새로운 디트로이트’를 조성할 계획이다. 또한 최근에는 디트로이트의 건축 디자인과 산업 디자인이 인정받으며 유네스코 세계 디자인 도시로 선정됐고, 매년 4만 명이 찾는 EDM 축제가 열리기도 한다.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재탄생하려는 움직임이다.

최근 우리나라의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디트로이트 출신 미국인이 출연해 디트로이트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그는 2013년 디트로이트가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로 선정됐다며, 디트로이트가 위험한 도시임을 역설했다. 분명 디트로이트는 아직 위험한 도시이며, 경제적으로 ‘실패한 도시’일지 모른다.

그러나 1900년대 입지조건을 잘 활용하여 미국 최대 자동차 도시가 됐던 디트로이트가, 다시 한번 미국 최대의 디자인 도시, 또는 EDM의 도시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언젠가 다시 디트로이트를 찾는다면 그때는 ‘죽은’ 도시 디트로이트가 아닌 ‘다시 살아난’ 디트로이트가 돼 있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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