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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들을 기억하는 법, 민주화운동 기념관 방문기

작성일 2018.03.27
▲ '국립 4.19 민주묘지'의 묘역
▲ '국립 4.19 민주묘지'의 묘역

우리나라의 민주화운동에서 역사적 장면 3가지를 꼽자면, 1960년 '4·19 혁명', 1980년 '5·18 민주화운동', 1987년 '6·10민주항쟁'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고 그분들 덕분에 우리는 지금의 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지금 대학생들에게 민주화운동은 역사책에서만 봐왔던 아득한 옛일로만 생각될 수 있다. 값진 희생을 잊지 않기 위해, 또 같은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민주화운동 기념관이 세워졌다. 그 기념관을 직접 방문해서 취재해보았다.

1. 4·19 혁명 기념관


▲ 4월 학생 혁명 기념탑
▲ 4월 학생 혁명 기념탑

▲ 4·19 혁명 기념관
▲ 4·19 혁명 기념관

4·19 혁명 기념관은 '국립 4.19 민주묘지' 안에 있다. 국립묘지 정문을 넘으면 가장 먼저 향냄새가 기분 좋게 코를 찌른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묘지 내 구석진 곳에 기념관이 보인다. 기념관은 1층 전시실과 2층 체험 및 영상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1층 전시실을 쭉 둘러보다 보면 4·19 혁명이 발생한 원인과 그 과정 및 결과를 자세히 알 수 있다. 간단히 줄여서 말하면, 4·19 혁명은 1960년 3월에 있었던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반발하여 학생과 시민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반독재 민주주의 운동을 말한다.

▲ 1960년 4·19 혁명의 원인
▲ 1960년 4·19 혁명의 원인

한국 근현대사에 대해 잘 몰랐던 탓도 있겠지만, 기념관을 보면서 지금 우리랑 같은 나이 또래의 대학생들이 주도적으로 시위하며 독재정권과 맞서 싸웠다는 사실에 계속해서 전율이 돋았다. 실제로 묘역에 있는 많은 수의 묘비에는 'OO 대학교', 'XX대학교'같이 대학교 이름이 적혀있다. 꽃다운 나이에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까지 잃으신 분들을 보고 엄숙해지기도 하고 나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만약에 내가 1960년에도 대학생이었다면 저분들이랑 똑같은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지금의 나는 '대학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의 행동과 사고를 하고 있을까? 나에 대해 많은 것을 물어보게 되는 '4·19 혁명 기념관'이었다.

▲ 고려대학교의 '4·18 선언문'. 지금도 고려대학교에서는 이날을 기념하여 매년 4월 18일에 마라톤을 하고 막걸리를 마신다고 한다
▲ 고려대학교의 '4·18 선언문'. 지금도 고려대학교에서는 이날을 기념하여 매년 4월 18일에 마라톤을 하고 막걸리를 마신다고 한다

▲ 마산에서는 고등학생들이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여 경찰과 맞서 싸웠다 (마산 1차 의거)
▲ 마산에서는 고등학생들이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여 경찰과 맞서 싸웠다 (마산 1차 의거)

▲ 초등학생들도 거리로 나왔다
▲ 초등학생들도 거리로 나왔다

▲ 4월 19일 그날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 4월 19일 그날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4월 26일에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4월 26일에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위치]
서울 강북구 4.19로 8길 17(수유동 산 9-1)

[운영 시간]
3월~10월 09:30~17:30
11월~2월 09:30~16:30 (월요일 휴관)

2. 5·18 민주화운동 기록관


▲ 5·18 민주화운동 기록관
▲ 5·18 민주화운동 기록관

많은 소설이나 영화에서 다루었던 소재인 5·18 민주화운동. 그 기록은 2011년 5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고 지금 '5·18 민주화운동기록관'에 보관되어 있다. 기록관은 5·18 민주화운동 당시 마지막 항쟁지였던 구 전남도청이 있는 '금남로'에 있다. 건물은 총 7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 2, 3, 6층에 기록들이 전시되어 있다. 근래에 갔던 전시관 혹은 박물관 중에 가장 규모가 크고 볼거리가 많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전시도 퀄리티 있었고 동선도 굉장히 효율적이었다.

5·18 민주화운동도 그 배경부터 말하자면 너무 길어지니 간단히 줄여보고자 한다. 당시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이 국회를 장악하는 동시에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휴교령이 내려졌다. 이에 광주 전남대 학생들이 항의하였고 공수부대가 폭력으로 이 시위를 제압했다. 이를 본 시민이 분개하며 결국 학생, 시민 너나 할 것 없이 계엄군과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맞서 싸우며 민주주의를 외친 사건이다. 희생자 수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사망자 수백 명, 부상자는 수천 명에 이른다고 한다.

▲ 구 전남도청
▲ 구 전남도청

▲ 한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작전명 '화려한 휴가'
▲ 한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작전명 '화려한 휴가'

▲ 당시 시위대를 제압하던 계엄군
▲ 당시 시위대를 제압하던 계엄군

▲ 5월 21일에 구 전남도청 앞에서 시민을 상대로 계엄군은 집단 발포를 하였다
▲ 5월 21일에 구 전남도청 앞에서 시민을 상대로 계엄군은 집단 발포를 하였다

▲ 당시 신문. 신군부는 선동과 날조로 국민의 눈과 귀를 모두 닫아버렸다
▲ 당시 신문. 신군부는 선동과 날조로 국민의 눈과 귀를 모두 닫아버렸다

기록관에는 당시 계엄군이 시민을 폭력적으로 제압하는 실제 영상이 있다. 끝까지 볼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하고 끔찍했다. 1980년이면 그렇게 오래된 옛날 일은 아니다. 겨우 37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겨우 37년 전에 광주 시내 한복판에서 시민을 상대로 군홧발로 차고 곤봉으로 때리고 총을 쏘고 하는 등의 행위를 보고 충격에서 헤어 나오기 쉽지 않았다. 오죽하면 ‘5월, 6월에 광주 내려가면 한 집 건너 제사를 한다’는 말도 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났었다.

▲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었는지 알 수 있는 진료비 청구서
▲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었는지 알 수 있는 진료비 청구서

▲ 글씨가 엉망이지만, 잊지 않겠습니다
▲ 글씨가 엉망이지만, 잊지 않겠습니다

[위치]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 211

[운영시간]
평일 09:00~18:00/ 토,일 공휴일 09:00~18:00 (월요일 휴관)

3. 이한열 기념관



1987년 6월 9일 호헌철폐와 독재 타도를 외치며 연세대학교 앞에서 시위하던 이한열 열사는 시위 진압을 위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로이터 통신기자(사실은 그의 동생이 촬영한 사진이라고 한다)가 촬영한 이한열 열사와 그를 부축하는 학우의 사진은 시민의 분노를 커지게 하였고 6월 10일부터 6월 29일까지 약 20일간 학생과 시민 등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민주화를 외치며 거리로 몰려나오게 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987년 7월 5일 결국 이한열 열사는 사망했지만, 후에 그와 가장 뜨거웠던 6월을 기념하기 위해 신촌에 '이한열 기념관'이 지어졌다. 총 4층 건물이었는데 전시는 3층과 4층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방문 당시 3층에서는 '이한열 장학금' 면접이 진행되고 있어서 자세히 살펴보지는 못했고, 4층에서는 영화 '1987'에서 사용된 소품과 실제 이한열 열사의 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 당시 신문. 이 신문은 많은 사람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 당시 신문. 이 신문은 많은 사람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 이한열 열사가 입고 있던 옷들. 신발은 한쪽만 남아있다
▲ 이한열 열사가 입고 있던 옷들. 신발은 한쪽만 남아있다

▲ 군화와 최루탄. 저기에 많은 사람들이 밟히고 눈물 흘렸다
▲ 군화와 최루탄. 저기에 많은 사람들이 밟히고 눈물 흘렸다

▲ 이한열 열사의 추모제 당시 서울 광장에 모인 사람들
▲ 이한열 열사의 추모제 당시 서울 광장에 모인 사람들

생각보다 이한열 기념관은 아담했다. 4층 전시실은 다락방 정도의 크기였는데 그래도 이한열 열사를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실제로 최루탄을 맞았을 당시에 입고 있던 옷을 보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신기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화나기도 하고. 만화동아리라고 속이면서까지 그는 사람들에게 알리고 또 힘을 모으고 싶어 했다. 그의 당시 심정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아주 어렴풋이나마 그가 어떤 힘으로 끈을 잡고 있었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위치]
서울특별시 마포구 신촌로12나길 26 이한열 기념관

[운영시간]
월요일-금요일 10:00~17:00 (공휴일 휴관)

'그런다고 세상이 달라져요?'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로 달라졌다. 시민의 힘이 지금 이런 사회를 만들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돌이켜보면 재작년 겨울을 불태웠던 촛불시위도 마찬가지다. 바뀐다는 보장을 누구도 하지 않았지만 바뀔 거라는 믿음으로 수많은 국민이 추운 날, 거리로 나와 한마음 한뜻으로 함께했다. 물론 힘 있는 몇 사람들의 말 몇 마디로 세상이 좌지우지될 때도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순간 우리나라를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게 한 건 시민의 단합과 희생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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